오늘날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경제를 설명하는 기본 문법처럼 여겨진다. 수요와 공급의 자율적인 상호작용, 정부의 최소 개입, 그리고 경쟁이 창출하는 효율성은 마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실제로 시장은 자연 발생적 질서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와 정책적 판단으로 설계된 구조물이다. 다양한 산업의 형성과 붕괴, 가격 결정 메커니즘, 기업 간 경쟁 환경은 모두 정부의 결정과 개입에 의해 끊임없이 조정되어 왔다.

미국 경제의 지난 100년은 이런 ‘시장 설계’의 연속이었다. 석유 파동 시기에는 에너지 공급을 조정하기 위해 유가를 통제했고, 대공황과 금융위기에는 정부가 신용 시스템을 구제하고 금융 시장에 규율을 부여했다. 시장의 균형은 자율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책 결정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즉, 시장은 단순히 경쟁을 허용하는 틀을 넘어서,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계되고 관리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시장’이라는 단어가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공간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그 이면의 권력과 의도를 놓치게 된다. 시장은 언제나 누군가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사회의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다.

미국의 주요 산업들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도의 기획과 조정이 있었다. 항공 산업은 정부 보조금과 방위산업 수요에 의해 성장했고, 반도체 산업은 국가 안보 전략의 일환으로 육성되었다.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청정에너지 산업 역시 세제 혜택, 규제 정책, 기술 투자 등 정부의 전략적 개입 없이는 태동조차 어려웠다.

산업정책은 단순한 지원금 지급이나 관세 부과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산업을 미래의 핵심으로 정의할 것인지, 어떤 기술을 공공의 자원으로 투자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실행이 포함된다. 특히 민간 기업이 단기적 이윤 추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장기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방향 전환은 정부만이 수행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적 개입은 성공만큼 실패도 낳았다. 잘못된 타이밍의 규제, 특정 기업에 대한 과도한 특혜, 기술 변화에 대한 오판 등은 오히려 시장을 왜곡시키고, 산업 전반에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의 경험조차 시장 설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치밀한 작업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변수와 선택이 개입되는지 보여준다. 시장은 자동조정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함을 조율하려는 시도가 바로 산업정책의 본질이다.

시장과 정치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이분법은 실제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시장은 언제나 정치의 산물이며, 정치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의도를 실현하려 한다. 고용, 물가, 산업 안전, 노동조건 등 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와 연결된다.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금리 조정,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규제 완화, 플랫폼 기업에 대한 반독점 정책 모두 시장이라는 장을 통해 정치가 실현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와 시장은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이룬다. 문제는 이 균형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 시장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을 자율에 맡기면 모든 것이 최적화된다는 믿음은 단순한 이상일 뿐이다. 오히려 불평등의 심화, 독점 구조의 강화, 생태계 파괴와 같은 부작용은 시장이 아무런 제어 없이 운용될 때 더욱 극단화된다.

시장은 제도, 법, 규율,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만 작동한다. 이런 기반은 정치가 만들어낸다. 따라서 시장은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지, 독립된 자연 질서가 아니다. 정치와 시장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시장의 배경에 숨은 권력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자유시장이라는 신화는 그 자체로 강력한 이념이다. 이 신화는 ‘정부는 무능하고 시장은 현명하다’는 이분법을 통해 공공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키며,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그러나 이 신화는 실증적 현실과 맞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정책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족쇄가 된다.

이 신화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제 상상력이다. 시장을 정치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 조직이 민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술 변화와 기후 위기, 고령화와 불평등 등 거대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공공적 전략을 모색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청정에너지는 미래 경제의 핵심축이다. 이 분야들 역시 시장 자율에만 맡겨서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실현하기 어렵다. 공정한 경쟁, 기술 윤리, 자원의 분배, 환경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려면 강력한 공공의 설계와 개입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마켓크래프팅이 요구된다.

이제는 시장을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가치 판단, 정책 선택, 제도 설계, 역사적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된 구조다. 그것은 우연이나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설계의 산물이다.

이런 인식은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시장은 조정될 수 있고,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며, 그 목적 또한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다. 단기적인 이윤보다 장기적인 안정성, 일부 기업의 이익보다 전체 시민의 복지, 혁신보다 포용을 우선시하는 시장도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가 시장을 어떤 것으로 상상하고, 어떤 방향으로 기획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시장을 정치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나은 경제를 설계할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