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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오브제

 
 
 
 
저   자
이재경
출판사
갈매나무
가   격
15.000원(256쪽)
출판일
202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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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보


■ 책 소개


오브제 센티멘털리즘, 조금 특별한 사물 감상법

흔히 번역가를 ‘옮긴이’라고 부른다. 번역은 저곳의 언어(출발어)를 이곳의 언어(도착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때, 단순히 언어만을 일차원적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번역가는 언어를 옮기면서 “언어 너머의 문화”와 “행간에 누운 정서와 태도”를 함께 나른다. 그래야만 더욱 정확하면서도 풍성한 번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설레는 오브제》는 저자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낯선 사물들에 다는 뒤늦은 ‘옮긴이 주’다. 또한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 사물 뒤편에 쌓인 사연과 궁리들을 탐색하다 저도 모르게 설레어버린 것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하다.

■ 저자 이재경
매일 언어의 국경에서 텍스트가 건널 다리를 짓고 그림자처럼 참호 속에 숨습니다.”

서강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했다. 경영컨설턴트와 출판 편집자를 거친 월급쟁이 생활을 뒤로하고, 2010년 전업 번역가가 됐다.

번역가는 생각한 만큼, 겪은 만큼, 느낀 만큼 번역한다. 자기객관화와 감정이입에 동시에 능해야 한다. 그간의 내 이력이 밑천이요, 비전공자로 산 세월이 저력이었다. 어느덧 번역이 가장 오래 몸담은 직업이 됐다.

밑천이 바닥날까봐 번역가의 참호 안팎에서 틈틈이 소소한 모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거기서 얻은 발상과 연상을 기록한다.

산문집 《젤다》, 시집 《고양이》, 고전명언집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해》를 엮고 옮겼고, 《편견의 이유》 《쓴다면 재미있게》 《깨어난 장미 인형들》 《민주주의는 없다》 《바이 디자인》 《소고기를 위한 변론》 《가치관의 탄생》 《셜로키언》 《뮬, 마약 운반 이야기》 등 50권 넘는 책을 번역했다.

■ 차례
머리말 - 번역가의 물체주머니

소소한 모두스 오페란디
팔러 체어 _ 환대의 공간에서 혐오의 상징까지
뱅커스 램프 _ 지난 시대의 실용, 장식이 되다
목수연필 _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이름 공유
페이퍼백 _ 참을 수 없는 수집의 가벼움
종이인형 _ 패션 아바타의 진화
갈색 봉지 _ 소박한 걸작, 삶의 조각들을 담다

일상의 궤도 밖에서
에스프레소 _ 지구 서식자의 행복
꿀뜨개 _ 인류의 정주생활을 추억하며
트래블러 태그 _ 도시 산책자의 자의식
소품함 _ 감성 유희를 위한 도구상자
텀블러 _ 박카스 온더록스부터 친환경 커피까지
무지개 파라솔 _ 캐주얼과 시대 유감

연상의 고리들
깅엄체크 _ 사강의 수영복과 바르도의 웨딩드레스
메리제인 슈즈 _ 여학생과 가사노동자
허니콤 볼 _ 랑그와 빠롤의 문제
페이퍼 나이프 _ 의도한 미완성이 주선한 뜻밖의 만남
나팔축음기 _ 오펜바흐를 좋아하세요?
쥘부채 _ 추파의 도구: 정념을 접었다가 폈다가

욕망의 부득이함
블루 윌로 _ 제조된 전설
비연호 _ 기쁨의 조건
차통 _ 시간을 밀봉하다
스콘 _ 데번이냐 콘월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꽃시계 _ 자연을 인간계에 편입하려던 오만한 발상
플뢰르 드 리스 _ 결사와 음모의 미학

마음의 여러 이름들
책갈피 _ 책장과 책장 사이에 시간의 태그를 달다
컴퍼스 로즈 _하늘과 바람과 별과 장미
드림캐처 _현실 공간에 꿈의 통로를 내다
사주침대 _공주님의 자기증명, 또는 엠패스의 고통
아티초크 _바람둥이의 심장
화장거울 _거울아 거울아 이제 깨져줄래

맺음말
참고문헌
사진 출처

 



도서요약
설레는 오브제


소소한 모두스 오페란디

뱅커스 램프 _ 지난 시대의 실용, 장식이 되다

영미 드라마에 한국 드라마의 밥상만큼 자주 등장하는 아이템이 있다. 바로 초록색 유리 갓과 황동 받침대에 쇠줄 스위치가 달린 탁상용 전등, 일명 뱅커스 램프다. 여기서 핵심은 영롱한 초록색 유리 갓이다. 유리 갓 안쪽은 오팔처럼 유백색이고 바깥쪽은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이라서 불을 켜면 아늑하게 밀도감 있는 빛이 생긴다.


뱅커스 램프는 사무와 연구의 공간에서 일상의 공간으로 퍼져나갔다. 포커테이블과 커피테이블까지, 화장대와 피아노 위까지 퍼졌다. BBC의 <에이번리의 앤>과 <미스 마플> 같은 시대극에도 나오고, <프레이저>와 <프렌즈> 같은 미국 시트콤에도 나온다. 법정 드라마와 학원물은 물론 액션물에도 등장한다. 음모자들의 등 뒤에도, 진실을 캐는 기자의 안경 너머에도 초록색 전등갓이 유유히 존재한다. 런던 타운하우스에도, 시골 코티지에도 마천루 사무실에도 주인공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뱅커스 램프는 지금은 기능성보다 빈티지한 매력 때문에 사랑받는다. 특정한 분위기가 있지만 놀랍게도 어느 공간에나 어울린다.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 올라앉아 있어도 멋스럽고, 차가운 철제 가구 사이에서도 멋진 포인트가 된다. 어둠 속에서는 고양이 눈처럼 빛나고, 데이지 화분 옆에서는 더없이 정겹다. 체계를 요하는 자리에 권위를 실어주고, 소박한 공간에 감성을 더한다. 집중이 필요한 자리에 초점을 낸다. 호텔 로비 같은 접객 공간에서는 향수와 계획을 동시에 부른다. 녹색은 심리적 안정을 주는 색으로 통한다. 극장의 무대 뒤에는 그린룸이 있다.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기하는 장소를 말한다. 뱅커스 램프는 내 공간에 작은 그린룸을 만든다.


전등 분야에서 뱅커스 램프와 빈티지한 매력을 다투는 것이 있다면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갓을 뽐내는 티파니 램프다. 티파니 램프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아르누보 디자인으로 이름을 날린 유리공예가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작품이다. 색색의 유리 조각들이 만드는 꽃과 자연의 모티프들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 이 램프는 처음부터 장식이 목적이었다.


뱅커스 램프와 티파니 램프는 같은 시대에 탄생했지만 지극히 상반된다. 한쪽은 금욕적이고 다른 쪽은 몹시 유미적이다. 한쪽은 근대의 기계적 대량생산으로 탄생했고, 다른 쪽은 거기에 반발해 탄생했다. 한쪽이 과거의 실용이 장식 요소로 바뀐 경우라면, 다른 쪽은 과거의 신예술운동에 고색창연이 낀 경우다.


백 년 전 맥패딘 공장에서 생산한 뱅커스 램프나 티파니 스튜디오가 제작한 티파니 램프는 이제 값비싼 골동품이 됐고,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현대의 복제품이다. 이 전등들은 자기 시대의 맥락을 떠나 현대의 공간들을 장식한다. 지금은 용도를 다하고 스타일을 잃었는데도 꾸준히 복제되는 것은 오히려 그런 튀는 맛 때문이다. 냇물에 박힌 돌이 흐름을 일깨우듯 우리가 흐르는 시간 속에 있음을 일깨우는 효과. 한 방향만 허락하는 시간에 순서부동의 반역을 꾀하는 기분. 사람들이 지금은 불편해진 옛 디자인을 소비하는 데는 이런 낭만적인 욕구가 있다. 다만 선택을 하라면, 나는 발광한 해파리 같은 조명기구보다는 진중한 뱅커스 램프가 더 좋다. 아직은.



일상의 궤도 밖에서

꿀뜨개 _ 인류의 정주생활을 추억하며

연말에 출판사가 꿀을 한 병 보냈다. 출판사에서 역자교정지와 책이나 받아봤지 선물은 거의 처음이었다. 거기다 출판 굿즈도 아니고 꿀이라니. 꿀 선물 자체가 처음이었다. 우아하게 개봉해서 냄새 한번 맡아보고 젓가락으로 찍어서 맛도 한번 본 다음, 커피포트 위의 어수선한 선반을 치우고 일단 고이 모셔둔다. 선물 개봉은 엄연한 의식이다. 그것도 이제는 우리에게 몇 가지 남지 않은, 뜸 들이기가 허용되는 의식이다. 허용되는 정도가 아니다. 소비 과시, 소비 놀이가 트렌드가 되면서 개봉은 오히려 전보다 더 중요한 의식이 됐다. 운동처럼 과시에도 몸풀기가 필요하다. 언박싱은 플렉스다.


다음 날 식빵을 구워서 입맛을 다시며 꿀을 꺼냈다. 꿀이 들어온 김에 오늘은 치즈크림 대신 꿀을 발라 먹으리.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꿀을 뜰 게 마땅치 않다. 눈앞의 버터나이프를 쓰자니 꿀이 떠지지 않고 질질 흐른다. 빵을 바짝 들이대고 꿀을 납죽 받아야 한다. 폼이 안 나는 건 둘째치고 병 입구가 꿀과 빵가루로 지저분해진다. 숟가락을 쓰면 좀 낫지만 꿀이 뭉텅뭉텅 떨어진다. 꿀에 범벅이 된 빵은 별로다. 그렇다고 작은 티스푼으로 꿀을 쭐쭐 흘리자니 감질난다. 다 집어치우고 싶어진다.


꿀을 뜨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있다. 꿀뜨개는 꿀을 뜨는 데 특화된 도구다. 오직 꿀을 뜨기 위해 탄생했고 존재한다. 사실 꿀을 뜬다기보다 꿀을 ‘감는’ 도구다. 꿀을 많이 잡기 위해 꿀이 닿는 면적을 늘렸고, 꿀을 감는 부분에는 나사처럼 홈이 패여 있다. 그래서 생긴 게 작은 벌통 같기도 하고 꿀벌 궁둥이 같기도 하다. 홈이 가늘면 꿀도 가늘게 떨어진다. 꿀의 점성과 표면장력을 이용한 고안이다. 꿀뜨개를 꿀이 담긴 병에 푹 담갔다가 돌리면서 뺀다. 옮길 때도 계속 돌리면 꿀이 떨어지지 않는다. 꿀을 떨어뜨리고 싶은 곳에서 돌리기를 멈추면 된다. 꿀이 천천히 가늘게 떨어지기 때문에 빵 가장자리를 따라 정교하게 따를 수도 있다. 약간의 숙련을 요하지만, 연장은 모름지기 숙련을 요하는 법. 꿀뜨개는 연장을 다루는 기분을 준다.


디지털혁명 이전의 물건들은 정해진 언어로 우리와 소통했다. 그 언어는 다감각적으로, 공감각적으로 작용했다. 거기에는 모양, 색, 향, 소리, 폰트 등 많은 것이 관여했다. 이것들로 물건의 용도와 사용법뿐 아니라 물건이 속한 나이, 계층, 취향 심지어 젠더까지 전달했다. 포도주병 같은 경우에는 산지도 담았다. 어깨가 솟은 병은 보르도 병이고, 어깨가 처진 병은 부르고뉴 병이다. 물건의 생김 자체가 사용설명서이며 마케팅 전략이었다. 우리는 태어나 모국어를 배우듯 우리 세계의 사물의 언어를 익혔다.


하지만 이제 많은 것이 변했다. 인터넷으로 산업과서비스가 융합하고 모바일기기가 일상화했다. 덕분에 인류는 자연 경관을 떠돌던 유목민에서 디지털 경관을 이동하는 유목민으로 진화했다. 진화의 동력은 ‘만능’에 대한 꿈이었다. 만능을 위해서 개인은 온/오프라인의 두 세계를 넘나들며 자아와 일상을 잘게 쪼갠다. 그러다 보니 공동의 신호가 힘을 잃고 사물의 언어도 해체된다. 약병 같은 화장품 병을 볼 때 대중목욕탕 같은 떡볶이집을 볼 때 흠칫하는 것은 내가 아직 유목민이 됐다는 뜻이다. 나는 이 멀티 세상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인류의 정주행생활이 끝났으므로 한 우물을 팔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때로는 꿀뜨개 같은 것들을 일상에 추가한다. 시간에 휩쓸리면서 가끔씩 붙잡고 쉬어가는 말뚝을 박듯이.



욕망의 부득이함

차통 _ 시간을 밀봉하다

전쟁이 나도 티타임을 해야 할 만큼 영국인의 차 사랑은 유난하다. 차를 마시지 않으면 영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시는 건 오로지 커피뿐. 차는, 특히 홍차는 내가 주문해서 마신 적이 거의 없다. 영국 사람들은 ‘커피? 차?’ 물어보지도 않고 홍차(블랙티)를 준다. 차를 싫어하는 것은 거기서는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받아 마시면 이번에는 우유를 넣지 않는 걸 신기해한다.


우리에게 ‘밥’이 식사를 뜻하게 됐다면 영국인에게는 ‘차’가 식사를 뜻하는 말이 됐다. 크림 티나 애프터눈 티는 스콘이나 샌드위치를 차와 함께 먹는 간식이다. 하이 티쯤 되면 간식이 아니라 아예 저녁 식사다. 빵은 물론이고 고기를 포함한 조리 음식까지 다 차려놓고 식탁에서 먹는다. 귀족이 낮은 티테이블에서 먹는 간식이 로우 티라면 노동자계급이 높은 식탁에서 먹는 식사가 하이 티였다.


하지만 내 흥미를 끈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혹한 건 검은 찻잎에서 붉게 우러나는 찻물도 아니고, 꽃같이 즐비한 다기도 아니었다. 선반에 있던 차통이었다. 차통은 잎차를 담아두는 용기를 말한다. 차통을 영어로 티캐디(tea caddy)라고 한다. 옛날 동남아시아에서 잎차를 달 때 쓰던 무게 단위 카티(kat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차가 사치품이었던 옛날에는 차통 뚜껑에 자물쇠를 달아두고 안주인이 직접 보관하면서 차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차통은 부엌이 아닌 귀족의 응접실에 어울려야 했고, 그래서 귀하고 값비싼 소재로 보석처럼 정교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중국풍 도자기 제품이 주를 이루다가 소재가 나무(물론 로즈우드 같은 비싼 나무), 은, 황동, 칠보, 자개, 상아 등으로 다양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대중화되면서 틴(tin) 소재의 통이 대세가 됐다. 소재는 단출해졌지만 디자인은 과거에 대한 향수인 듯 풍자인 듯 여전히 요란하다.


아무튼 내 눈에는 찻집이나 가정집 선반에 나란히 모아둔 틴 차통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군용반합과 사리함처럼 생긴 것부터 중국 코담배 단지와 우리나라 노리개 침통처럼 생긴 것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각진 통에 동그란 뚜껑이 박혀 있는 차통이 제일 정감 간다. 어릴 때 보던 코코아 통이랑 비슷해서 그런가? 사람은 친숙한 것들의 인력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반들반들한 새것보다 적당히 녹나고 닳은 통들이 더 예쁘다. 시간이 장식이 되어 붙어 있어야 그럴듯해진다.


차는 어떤 면에서 향수와 비슷하다. 운치에 대한 인간의 발상과 그걸 실현한 노동과 자본이 작은 용기 안에 쟁여 있다. 원료가 원산지에서 소비지로 이동하면서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거치고 복잡한 가공과 유통 과정을 밟아서 한 통의 향으로 집약된다. 동시에 수없이 손을 타면서 끝없이 부가가치가 붙는다. 수축과 팽창이 동시에 일어난다. 자연과 인위가 결합한다. 마지막에는 그걸 향유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화려한 패키지에 밀봉된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피땀을 한 손에 쥐는 사치에 걸맞는 가격표가 붙는다. 이 사치의 이권을 놓고 한때 왕조가 망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졌던 과거까지 있다면 더 짜릿하다. 사람은 어쩌면 ‘웰빙’보다 ‘웰빙의 느낌’에 돈을 쓰고 그 기억을 산다. 그게 내용물이 없어진 후에도 용기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같다.


마무리는 차처럼 훈훈하게. 차통에는 차나무를 치우고 찻잎을 말린 하늘과 바람과 흙과 땅이 담겨 있다. 특히 시간이 향미로 변해 담겨 있다. 차가 다 떨어진 후에도 통에 차향이 남는다. 시간이 사람을 조금 더 기다려준다. 거기 담았던 것이 시간이라서 그럴까. 차통은 원래의 용도를 다한 후에도 녹을 훈장처럼 달고 추억과 앞날을 모아두는 용도로 쓰인다. 담아둘 수 없는 것들을 담아두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차통은 꽤 성공한 케이스다. 



마음의 여러 이름들

책갈피 _ 책장과 책장 사이에 시간의 태그를 달다

음악이나 음식만 사람을 타임머신에 태우는 게 아니다. 책갈피도 시간여행의 티켓이 된다. 몇 달 전 책장을 정리할 때였다. 오래된 책 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나왔다. 파란 목마가 그려진 카드. 그걸 보는 순간 전생처럼 한 장면이 떠올랐고 내가 다시 거기에 있었다. 춥고 바람 불던 삼청동 거리. 반지하 골동품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는데, 주인이 가게 안이 아니라 길 건너에서 달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가게를 다 봤는데 살 건 없고, 바람 쐬고 있다가 부리나케 달려와 문을 열어준 가게 주인에게 미안해서 나는 카드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때 친구가 내 손에서 카드를 채 갔다. “내가 사줄게. 이거 보니까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 난다.”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 난다.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 난다…….


방 안의 시간은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5월. 찰나였지만 정말로 크리스마스 기분이 났다. 다음 순간 나는 카드를 손에 든 채 도로 현실로 쏟아지며 울컥 멀미를 느꼈다.


우리는 시간을 잡아두듯 책에다 읽던 자리를 매긴다. 앤 패디먼은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책을 읽다가 엎어두는 것이 일시정지 버튼이라면 책갈피로 책을 닫는 것은 스톱 버튼을 누르는 것”이라고 했다.


낡은 책 속에서 여전히 새것 같은 책갈피가 과거의 조각처럼 툭 떨어질 때가 있다. 그걸 품고 있던 책은 세월을 직격으로 맞아 누렇게 뜨고 먼지의 독에 시들었지만 책갈피 혼자 시간여행자처럼 구겨지지 바래지도 않고 돌아올 때가 있다.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가 돌아와 시간 지연(time dilation)이 일어난 것처럼.


그게 뭐든.


미술관 리플릿, ‘지구 최대 서점’ 아마존의 둥근 화살표, 패션잡지에 껴 있던 정기구독 신청카드, 종로 시네코아 <아멜리에> 영화표, 너무나 점잖은 암스테르담 섹스박물관 입장권, 옛날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빳빳하게 코팅한 네잎클로버, 바스러질 것 같은 꽃잎, 화장품 상자를 묶었던 리본, 초콜릿을 쌌던 박엽지, 다시 가지 않은 카페의 스탬프카드, 신수동 어딘가의 약도가 그려진 냅킨, 가방 태그, 청바지 태그, 시간의 지우개가 책 제목을 지운 감광지 도서 반납증. 유령 모양의 반투명 포스트잇.


도톰한 하늘색 와펜이 들어 있던 책 속에는 미세하게 움푹한 자국이 남았다. 천체의 중력이 우주 공간을 휘게 한 것처럼. 시간의 씨앗이 시간의 과육에 파고든 것처럼.


어떤 때는 책과 책갈피가 한 몸이 된 듯 분리하기 힘들 때가 있다.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포켓판 삼중당문고 《생의 한가운데》에 들어 있던 분홍 카드가 그랬다. 책과 분리하는 순간 책도 책갈피도 특별함을 잃었다. 인간의 의식 밖에서 쌓인 세월은 꿈처럼 날아가고 그냥 낡은 종이만 남았다. 나는 시간의 강물에서 책갈피는 건졌지만 책은 건지지 못했다. 이사를 앞두고 책을 정리하는 내게 더는 그 책을 붙잡고 있을 명분도 시력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보냈고, 망각의 강을 건넜던 책갈피들만 오히려 돌아와 미련처럼 남았다. 사실을 책갈피라고 부르기도 뭣한 것들이다. 삶의 각질처럼 흩어져 있던 쪼가리들이 책 속에 박제된 것이었다. 진짜 책갈피는 사 모으기만 하고 실제로는 잃어버릴까 봐 잘 쓰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 책갈피는 자리를 지키는 용도인데, 잃어버려도 되는 것들이 주로 그 용도에 동원된다. 하지만 잊히지 않으면 발견되지도 않는 법이다. 책에 들어가 있지 않았던 책갈피는 아무리 오래된 것도 의미가 없다. 봐도 멀미가 나지 않는다.


나는 책 모서리를 접지 않는다. 책 자체에는 어떤 식으로든 표시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 썼던 교재나 참고서 빼고는 책에 낙서도, 메모도 하지 않는다. 누가 책에 끄적거리거나 책장을 접는 걸 보면 이상하게 오싹하다. 반양장본 날개나 띠지로 읽던 데를 막아놓는 것도 싫다. 펼쳐놓거나 엎어놓고 방치한 책도 보기 불편하다. 이 강박이 책을 읽다가 아무거나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책갈피를 하는 버릇을 낳았다. 짧은 유효기간을 타고난 것들이 이렇게 붙들려 유물이 된다. 책갈피는 책을 내가 그걸 읽던 시간과 공간에 말뚝처럼 묶는다.


그때 내가 파란 목마 카드를 사준 친구는 이제 없다. 이별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지만 나는 그저 ‘차원을 달리했다’라고만 하고 싶다. 카드를 산 가게도 없다. 삼청동에 밀려온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로 다른 여러 가게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따지면 잡동사니를 좋아하고 책을 사방에 쌓아놓던 그때의 나도 없다. ‘미니멀이 노멀’을 외치며 오늘도 버릴 것을 찾는 아직은 생소한 내가 있을 뿐.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 아내는 죽은 남편이 과거로부터 불쑥불쑥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과거에 남편이 미래로 여행했던 순간들. 그리고 아내는 더는 남편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도 비슷하다. 과거의 내가 심은 리마인더들이 조만간 재고를 다할 날이 온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버리고 현재에 갇히기로 결심한 전향자의 비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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