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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하)

저   자
메이위저(역:정주은)
출판사
쌤앤파커스
가   격
16,000원(580쪽)
출판일
2019년 11월
도서정보


■ 책 소개


권력을 향한 음모와 배신, 그리고 충격적 반전
서로를 지키기 위한 두 남녀의 처절한 사투


천하에 뜻을 품은 강건한 남자, 그에게 패업을 쥐어주고자 하는 여인. 운명처럼 만난 남자와 여자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끝에 서 있다. 권력의 정상에 올랐으나, 나아가면 칼바람이 몰아치고, 물러서면 깊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는다. 일찍이 죽마고우였던 형제였으나 서로 죽여야 하는 비정한 상황에 몰린다. 믿음이 깊던 주인과 충직한 부하였으나 적이 되어 생사를 위해 서로 싸워야 한다. 친족에게 공격을 받고, 가족에게 버려진다.


믿었던 벗들의 배신과 음모, 그들을 죽여야 하는 가혹한 운명. 천하에 뜻을 세워 칼날을 벼르고, 차게 빛나는 철갑을 두르고 험한 곳에 오로지 소기와 왕현 그 둘만이 외로이 서 있다. 오랜 전장 생활로 왕현의 몸은 날로 쇠약해지고, 소기는 다시 생을 장담할 수 없는 변방의 전장에 나선다. 그러나 두 남녀를 떨어뜨렸던 변방의 소란이 황궁을 장악하려는 세력의 음모였음이 드러나지만, 이미 내부 깊숙이 황궁의 세력들이 반란군에게 넘어간 탓에 소기의 주군이 회군할 수 있는 시간을 왕현 자신이 스스로 벌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 저자 메이위저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중국의 바링허우(八零后)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1980년 충칭(重慶)에서 태어난 그녀는 역사와 소설에 관심이 많아 웹 게시판에 올렸던 글들이 큰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표작 《제왕업(帝王業)》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작품은 방대하고 호쾌한 스타일과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탄탄한 스토리로 인기를 모으며, 온라인 조회수 10억 뷰를 넘어선 것은 물론, 2007년 출간된 후 500만 부가 팔리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중국 최고의 드라마 제작진과 장쯔이 등이 주연으로 참여한 블록버스터 드라마 《강산고인(江山故人)》 제작이 완료된 상태로, 2020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작가의 주요 작품으로 《봉혈(鳳血)》, 《황도(凰圖)》, ‘의향빈영(衣香鬂影)’ 시리즈 등 장편소설과 수필집 《오랜만입니다》가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드라마로 소개되었다. 현재는 유럽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 중이다.


■ 역자 정주은
고려대학교 중문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여러 해 동안 철학, 문학, 사학, 육아, 자기계발,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번역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제갈량의 지혜에서 배우다》, 《정진: 위대한 사람이 되는 법》, 《몸, 예술로 말하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를 위한 철학형 사유》 등이 있다.


■ 차례
3부 기나긴 가시밭길
왕숙, 상서에 오르다 | 여한餘恨 | 남벌南伐 | 맹약을 맺다 | 다시 봄이 찾아오다 | 괴로운 진실과 마주하다 | 어머니와 영영 이별하다 | 의심은 상처를 남긴다 | 암살暗殺 | 품은 마음은 진실하나니 | 혼약婚約 | 황제를 폐하다 | 막된 생각을 접어라 | 비환悲歡


4부 철혈강산鐵血江山
양난兩難 | 침묵하는 법 | 다시 북벌에 나서다 | 암류暗流 |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니 | 구석九錫 |
휘날리는 운명을 어이하리 | 선혈은 칼날을 물들이네 | 충신이냐 변절자냐 |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라 | 허를 찌르다 | 시기심 강하고 잔인한 자 | 주도면밀하게 일을 꾸미다 | 교전交戰 |
평생의 한이 있나니 | 제왕의 패업을 이루다 | 천하天下 | 천고千古


사략史略


후기後記
제비야, 제비야, 날아라, 날아 | 녹의綠衣
한광漢廣 | 이 얼마나 좋은가!


 



도서요약


제왕업(하)


기나긴 가시밭길

왕숙, 상서에 오르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정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무 일도 없소. 그저 내 옆에 잠시 앉아있어 주시오."그는 살며시 눈을 감고는 아래턱을 내 이마에 가볍게 갖다 댔다. 흡족한 듯 하면서 지친 듯한 한 줄기 탄식에 마음 한구석이 저려와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사근사근히 말했다. “아직도 강남 지방의 수재 때문에 걱정인가요?” 소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걸쳐 있던 한 줄기 웃음마저 거둔 채 깊이 탄식했다. "정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반군은 저 먼 강남에 주둔하고 있어 아직 출병을 못하고 있는데, 이 같은 시기에 또 수재가 나서 백성들이 살 집을 잃고 떠도는 상황에서도 문무백관 중 누구 하나 이 일을 맡으려 나서는 자가 없소!“


소기는 탄식을 내뱉으며 담담히 말했다. "생각해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에게 이런 중임을 맡을 뜻이 있는지 모르겠소."


나는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기를 바라봤다.

“혹시…… 오라버니를 말하는 건가요?”


“왕숙의 재주와 지혜라면 능히 이 중임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소. 다만 그에게 이 같은 뜻이 있는지…….” 소기가 그윽한 눈빛으로 깊이 탄식했다. “오랫동안 수많은 세가의 자제들은 나를 의심하고 꺼려 내게 중용되지 않으려 했소. 만약 왕숙이 이번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다면, 내가 세가자제들에게 결코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오.”


나는 담담히 웃었다. 소기의 뜻은 이미 충분히 알았다. “만약 당신이 파격적으로 오라버니를 하도총독에 기용하면 자연히 다른 세가도 의구심과 선입견을 버리고 당신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 이 말이지요?”


“정확히 맞혔소!” 소기가 웃으며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약간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라버니 생각이 어떨지 모르니…….”


“그가 전심을 다해 이 일을 맡을지는 왕비에게 달렸소.” 눈썹을 치키며 나를 보는 소기의 눈에 교활한 웃음이 가득찼다.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한참 변죽만 울리더니 결국은 이 말을 하려고…… 이 가증스러운 인간!


이튿날 나는 따르는 시녀만 데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오라버니가 묵고 있는 성 외각의 별관을 찾았다.


선경처럼 고요하고 아취가 느껴지는 별관 입구에 서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찌하면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 귀신같이 아니, 오라버니는 진정한 풍류남아였다. 오라버니는 손재주가 기막히게 뛰어난 장인들을 찾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 이 조그마한 별관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만드는 신기를 발휘하게 했다. 안으로 들어 안채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부드럽고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오라버니는 살짝 몸을 뒤집으며 눈을 감은 채로 느른하게 말했다. “벽색아, 술을 올려라 ——.”


나는 손끝을 탁자에 놓인 술잔으로 뻗어 술을 조금 묻히고는 오라버니의 준수하고 청아한 얼굴에 향해 털었다. 느닷없이 물방울을 맞은 오라버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고 일어났다. “주안, 이 고약한 계집애 같으니!”


“미인도 감상하고 게으른 인간도 단속할 겸 왔지.” 나는 오라버니가 들고 있는 술잔을 재빨리 빼앗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오라버니를 단속할 사람이 없을 줄 알아?”


오라버니가 몸을 굴려 일어나 앉고는 깜짝 놀라며 웃었다. “뉘 집의 무지막지한 여인이 집을 잘못 찾아왔나?”


나는 눈을 들어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뜻은 마음에서 생겨나고 곡은 마음을 따라 흐르는 법, 인학적은 여전히 천하제일이지만 오라버니의 마음은 어때? 아직도 지난날처럼 드높고 자유로워?”


나는 오라버니의 눈빛을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오라버니는 아무가 어려서부터 탄복한 사람이야. 예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이튿날 오라버니가 먼저 소기를 찾아가 알현을 청했다.


올가을은 유난히도 빨리 지나갔다. 낙엽이 다 떨어졌을 즈음, 황릉에서 보낸 상소를 받았다. 황숙 자담의 시첨 소씨가 자담의 첫째 아이를 낳았으며 딸이라고 했다. 아이는 황실의 법도에 따라 표(表)를 올려 태왕태후에게서 이름을 받아야만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태황태후에게 올려진 상소는 관례에 따라 내게 보내졌다. 붉은 비단으로 된 그 얇디얇은 상소를 움켜쥔 채, 나는 순간 얼이 빠졌다.


그는 이미 시첩을 두었고 딸까지 보았구나……. 자담, 자담! 이미 5년이나 흘렀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쩐 이유에선지 가슴이 허하고 무너져 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비틀리는 것만 같았다.


헤어지던 그때만 하더라도 자담은 행동거지가 말쑥한 소년이었는데 벌써 딸까지 두었다니……. 서글픈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뭔가를 털어낸 듯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황릉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던 그에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리따운 여인이 생겼다니, 나도 사뭇 안심이 되었다.


환히 타오르던 촛불이 사그라지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거울 앞에 앉아 비녀와 장신구를 빼내니 삼단 같은 머리가 구름처럼 흩어져 허리까지 내려왔다.

“나와 자담이 어린 시절에 서로를 좋아한 것은 당신도 아는 사실이에요.” 눈썹을 치키며 태연히 미소 짓고는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당시 당신은 천하에 왕현이라는 여인이 있음을 몰랐고, 나 또한 세상에 소기라는 사내가 있음을 몰랐어요. 그 시절에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줄로만 알았고,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천진난만하던 시절의 남녀가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걸 몰랐어요.”


나는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그의 목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는, 말소리를 늘이며 가볍게 웃었다. “어찌 다른지는…… 한 번 해보면 알지 않겠어요?”


“한번 해보라고?” 소기의 숨소리가 미친 듯이 빨라지고 냉엄하던 얼굴이 삽시에 무너지며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입으로 한 말이니 후회 마시오!”


소기는 갑자기 팔에 힘을 주며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성큼성큼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한餘恨

나는 몸을 숙이고 잠깐 보다가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진정 회은을 출정시키지 않을 작정이에요?”


소기는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 깊은 미소가 무엇을 말하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회은은 당연히 출전하게 될 것이오. 하나 지금은 아니라오. 나는 다른 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누구요?” 순간 어리둥절해 물었다. 군대를 이끌고 남정을 나서는데 송회은보다 더 적합한 자가 누구란 말인가?


소기는 내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품으로 다시 끌어당기더니 미소를 머금고 나를 응시했다. “이틀 안에 당도할 그 사람은 당신에게 큰 기쁨과 놀라움을 선사할 거요.”


그가 말하는 ‘기쁨과 놀라움’이 무엇일지 머리를 쥐어짰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라버니일 것 같기는 한데, 오라버니가 남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틀 동안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이어지다가 밤중에는 갑자기 눈까지 많이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월 열닷새가 되어 오늘 밤이면 원소절 궁연이 열릴 터였다.


나는 멍하니 걸음을 멈춘 채 추위도 겁내지 않고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매화를 바라보며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바닥에 얇게 쌓인 눈으로 천지가 하얗게 물들어 청정무구한 신선의 땅을 옮겨놓은 듯했다. 호된 눈서리도 아랑곳 않고 그 오래된 매화나무 몇 그루의 구불구불 휘어진 가지 위로 흐드러지게 핀 붉은 매화는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 외려 처연한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무심코 시선을 드니, 그 기품 있는 형체가 이 순간 너무나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그를 만났다. 지난날과 다름없는 고아한 모습으로, 청삼에 은여우 가죽으로 만든 피풍을 걸치고 풍모(風貌, 방한모)로 반쯤 가린 채 기품 있게 그 매화나무 안쪽에서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어쩌면 환영조차 이리도 진짜 같은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와 마주 봤다.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가자 그의 어깨 위로 붉은 매화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자담의 고개가 들리고 풍모가 미끄러져 떨어지니…… 그 모습은 빙설처럼 외롭고 깨끗했으며 그 내면은 한담(寒潭)처럼 맑고 쓸쓸하여, 담담히 시선을 드는 순간 천지간의 가장 아름다운 광채를 앗아 간 듯했다.


남벌南伐

지난 날 우리가 함께 어울려 놀 때면 금아도 늘 뒤를 따랐으니 그 이름에 담긴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어떤 여인이 자기 딸에게 또 다른 여인의 별명을 이름으로 붙여주고 싶겠는가? 대놓고 거스를 수는 없더라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을 것이다. “금아는 좋은 아이야…….” 자담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절대 금아를 홀대하면 안 돼.”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자담의 입가에 처량한 웃음 한 줄기가 떠올랐다. “그가 잘해주니?”


결국 자담은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어왔다. 나는 안타깝게 그를 바라봤다.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자담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변통을 할 줄 모를까? 이 궁궐 안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그가 한 말을 못 들은 양 무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였다. “황숙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신 고로 더는 폐를 끼칠 수 없는지라 나중에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남정에 나설 사람을 기다린다더니, 소기가 기다린 사람이 자담이었구나.


비록 적적하기는 할지라도 이처럼 시비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곳보다는 계속 황릉에 머무르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금아와 어린 딸이 그의 곁에 있어줄 것이고, 평안히 늙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조서 한 장이 결국 그를 모든 것이 변해버린 이 궁궐로 불러들였다. 아마도 자담은 아직 모를 것이다. 피붙이끼리 칼을 맞대야 하는 참담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자담, 나는 어찌해야 할까? 네 앞에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는데…….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고 연회 분위기도 무르익었을 즈음, 사람들은 모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소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무를 그치라 손짓했다. 전각을 가득 채웠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삽시간에 잦아들며 묵직한 정적이 내렸다.


지금 이 순간, 전각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난날의 연인에게 어찌 청을 하는지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자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황숙이 도와주시니 우리 사직의 복이자 만백성의 복입니다. 이 왕현, 황숙의 승전보와 무사 귀환을 삼가 축원합니다.”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자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놀라움과 괴로움으로 물든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물러날 수 있는 티끌만 한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술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나는 시선을 내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자담도, 소기도 보지 않았으며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인들이 날 박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 여기게 두지 뭐. 이후로 자담이 날 미워해도 상관없어……. 자담, 난 그저 네가 어리석게 목숨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기만 하면 돼. 예전에 네가 알려줬잖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목숨이라고. 또 사람은 복을 아낄 줄 알아야하고, 더욱이 목숨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도 알려줬잖아. 네가 가르쳐준 것이니 넌 반드시 해내야 해.


이튿날 성지가 내려졌다. 황숙 자담이 평남대원수 직을 맡고 송회은이 그의 부장을 맡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강남 역당을 토벌하러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의심은 상처를 남긴다

마지막 날 밤, 나는 소복을 입고 영전 앞에 몸을 세워 꿇어앉았다.


소기도 사찰에 머물며 내가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을 함께했다. 밤이 깊어 찬 기운이 내리자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을 함께했다. 밤이 깊어 찬 기운이 내리자 소기는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밤이 차니 더는 끓고 있지 마시오.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음을 알면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지!” 나는 가슴속이 처량하여 그저 고개만 저었다.


청의(靑衣)를 입은 비구니 한 명이 소리 없이 서고고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을 전했다. 서고고는 묵직한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숙인 채 침음만 삼켰는데, 뭔가 주저하면서도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힘없는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서고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이 말했다. “묘정이 밤늦도록 외전에 꿇어앉아, 공주 마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묘정이 누군가?” 순간 어리둥절해 물었다.


“묘정은…….” 서고고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예전에 재상부에 있던 금아입니다.”


궁에서 죄를 짓고 자안사의 비구니로 신분이 낮아진 자들은 모두 산 아래에 있는 초라한 거처에 머물며 마음대로 출입을 할 수도, 절에 오를 수도 없었다. 더욱이 어머니가 계시는 내원에는 걸음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금아가 이번에 자안사 안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한 것만으로도 서고고가 평소에 금아의 뒤를 얼마나 살펴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같은 때에 금아를 보고 싶지 않았으나 어머니 영전에서 서고고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어, 피곤에 찌든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게.”


“금아가 왕야를 뵙습니다.” 금아는 소기 앞에 꿇어앉을 뿐 내 쪽으로는 절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냘팠지만 자신의 예전 이름을 쓰는 모습이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소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쓱 훑어보고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서고고도 얼굴색이 변해 세게 기침을 했다. “묘정! 왕비께서는 지난날 주종의 정을 생각해 네가 이곳에 들도록 윤허하셨는데 은혜에 감사드리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금아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자 차디찬 눈빛이 내게 쏟아졌다. “은혜에 감사드리라고요? 저이가 내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데요?”


어머니의 영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힘없이 이마를 짚으며 더 이상 금아를 보고 싶지 않아 말했다. “오늘은 네가 소란을 피울 만한 날이 아니니 그만 물러가라!”


그러나 입구에 이르러 갑자기 몸부림을 치더니 한사코 문간을 붙잡고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왕비와 황숙이 부정하게 정을 통한 확실한 증거가 신첩의 수중에 있으니 왕야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경루 소리가 울렸다. 이미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한밤중이었다. 달이 중천에 뜬 아름다운 밤인데도 엄동설한처럼 추웠다.


“늦었으니 그만 쉬시오.” 소기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히 말하며 순식간에 감정을 거뒀다. 모든 감정을 보이지 않는 가면 아래 숨겼으나 말 속에서 차디찬 기운이 배어 나왔다.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나요?” 나는 웃으며 힘없이 두 손을 풀었다. “대관절 내가 무엇을 했기에 그토록 실망했나요?” 지금까지 내가 노력하고 포기한 것들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겨우 홧김에 내뱉은 말 한마디에 이토록 쉽게 실망하다니……. 그렇다면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지치지도, 아프지도 않단 말인가? 고개를 저으며 웃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기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나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안으려고 했다. 나는 단호히 몸을 빼며 그에게 몸을 굽혀 반절을 올렸다. “소첩, 아직 상중이라 왕야와 같은 곳에 거할 수 없으니 왕야께서 용서해주십시오!”


소기는 허공에서 손을 멈추고는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힘없이 뒤돌아 나갔다.


서고고와 아월이 무슨 말로 달래도 나는 예장왕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기와 냉담하게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다 너무 피곤했다. 오랫동안 쌓아온 의심이 결국 서로의 마음속에 원한의 싹을 틔어 상처를 남겼으며 풀 수 없는 응어리를 만들었다.



철혈강산鐵血江山

다시 북벌에 나서다

바람은 차고, 길은 힘겹고, 밤은 깊었다.


우리 둘만이 서로를 안은 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켜 바닥 위로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핏발이 잔뜩 선 눈은 몹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날카로운 와중에 침울함을 내비쳤다.


소기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길게 탄식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결국 당신을, 또 천하를 저버리고 말았소.”


그가 자신을 탓하리란 것을 진즉에 알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당경이 난을 일으키고 외적을 끌어들여 백성들이 큰 화를 입었다. 사람을 잘못 봤고 방비가 늦었다는 점에서 소기는 책임을 미룰 수 없었다.


그러나 소기는 신이 아니었다. 10여 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전장의 피바다를 같이 건넌 형제라 할지라도 야심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내 뱃속에는 나와 소기의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전쟁통에 부모와 모든 것을 잃은 이 아이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보물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켜줄 것이며, 아이에게 사랑과 온기를 보상해줄 것이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그 많은 의지가지없는 아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심아의 손을 잡고 회랑을 지나면서 내 마음속은 점점 더 밝아지고 분명해졌다. ‘사내들의 세상인 전쟁에서, 여인은 그저 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밖에도 매우 많았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


오늘 밤이 지나면 얼마나 긴긴밤을 보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떨리는 손길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소기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


“아이가 말을 떼기 전에, 처음으로 아버지란 말을 하기 전에 돌아오리다. 아무, 기다려주시오. 아무리 고되고 힘들더라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거기까지 말하고 목이 멘 소기는 목울대를 울렁이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붉어진 두 눈이 나를 마음속에 담으려는 듯 가만히 바라봤다. 바르르 떨리는 몸이 그의 고통과 무력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원희(元熙) 5월, 예장왕이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북벌에 나섰다.


주도면밀하게 일을 꾸미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정말 그대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지난날의 연약한 아무가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소기이기에 과감히 나를 이 위태로운 곳에 두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다.” 나는 옥수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내가 왕현이기 때문에 소기는 이 판을 내 손에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분과 은정, 도의로 따지면 우리는 부부이자 사랑하는 반려다.” 나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이 제왕의 패업을 이루는 길에서 우리는 함께 싸우는 지기니라. 태평할 때는 깊은 규중에서 그에게 먹을 갈아줄 것이나, 혼란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그를 둘러싼 가시덤불을 쳐낼 것이다. 만약 나를 그저 귀하고 연약한 여인으로만 본다면 나를 알고 나를 믿는 그 소기가 아닐 것이고, 나 또한 그런 평범한 사내와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제왕의 패업, 제왕의 패업…… 줄곧 제왕의 패업을 이루고자 한 이는 소기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야지, 애당초 내가 원한 낭군은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존귀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는 장차 천하를 정보하고 나를 정복할 것이며, 또한 내게 정복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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