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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상)

저   자
메이위저(역:정주은)
출판사
쌤앤파커스
가   격
16,000원(544쪽)
출판일
2019년 11월
도서정보


■ 책 소개

 

패업을 둘러싼 권력 쟁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한 여인의 빛나는 일생을 담아낸 고전 대작

 

2007년 출간된 후 10년간 다양한 판본을 거듭하며 5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온라인 조회수도 누적 10억 뷰를 돌파한 초대형 베스트셀러 ≪제왕업帝王業≫이 전 2권으로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미 중국 소설/드라마 마니아들에게는 이미 ‘최고의 고장극’으로 이미 입소문을 통해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황권이 약화된 틈을 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영웅들의 피비린내 나는 각축전 속에서, 금지옥엽으로 보살핌만 받던 한 여인이 점차 권력의 비정함을 깨닫고 지독히도 사랑하는 한 남자와 패권을 위해 나서는 방대한 스케일의 호쾌한 무협 멜로극이다. 이 작품은 1980년생 여성작가 메이위저(寐語者)의 데뷔작으로서, 섬세하기만 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광활한 무대 위에서 스토리 전개가 매우 빠르고, 인물과 사건이 매우 선 굵게 묘사되는가 하면, 권력의 비정한 속성, 욕망을 위한 배신, 사랑의 절절함 등 속도감과 섬세함이 겸비된 작품으로 독자와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 저자 메이위저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중국의 바링허우(八零后)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1980년 충칭(重慶)에서 태어난 그녀는 역사와 소설에 관심이 많아 웹 게시판에 올렸던 글들이 큰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표작 《제왕업(帝王業)》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작품은 방대하고 호쾌한 스타일과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탄탄한 스토리로 인기를 모으며, 온라인 조회수 10억 뷰를 넘어선 것은 물론, 2007년 출간된 후 500만 부가 팔리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중국 최고의 드라마 제작진과 장쯔이 등이 주연으로 참여한 블록버스터 드라마 《강산고인(江山故人)》 제작이 완료된 상태로, 2020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작가의 주요 작품으로 《봉혈(鳳血)》, 《황도(凰圖)》, ‘의향빈영(衣香鬂影)’ 시리즈 등 장편소설과 수필집 《오랜만입니다》가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드라마로 소개되었다. 현재는 유럽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 중이다.

 

■ 역자 정주은
고려대학교 중문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여러 해 동안 철학, 문학, 사학, 육아, 자기계발,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번역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제갈량의 지혜에서 배우다》, 《정진: 위대한 사람이 되는 법》, 《몸, 예술로 말하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를 위한 철학형 사유》 등이 있다.

 

■ 차례
1부 찬란하던 시절, 지나가다
햇살이 쏟아지다 | 바람이 불다 | 비바람이 치다  | 낭군을 만나다 | 변고가 생기다 | 하란賀蘭  | 위험천만한 길을 가다 | 사지死地 | 섬뜩한 기다림  | 혼비백산魂飛魄散 | 죽음의 문턱 | 애증愛憎  | 화복禍福 | 까닭 모를 분노 | 당신과 나 사이  | 진퇴進退 | 매혹하다 |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2부 황궁, 뒤집어지다
함정 | 항장降將 | 성을 빼앗다  | 함께하다 | 토벌討伐 | 천자가 거처하는 곳  | 대립 | 작비昨非 | 다급한 발걸음  | 황궁에서 정변이 일어나다 | 요절夭折  | 미간에 서린 한기 | 탁고託孤

 



도서요약


제왕업(상)


찬란하던 시절, 지나가다

햇살이 쏟아지다

금년 8월 열사흗날은 내 열다섯 번째 생일이자 계례(筓禮,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는 성년식)를 치르는 날이다.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예복으로 겹겹이 몸을 감싼 채 비녀를 꽂아 아래로 늘어진 옥돌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관을 올리고 통이 넓고 길이까지 긴 치마를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자니, 여태껏 입던 가볍고 편한 나삼(羅衫)의 느낌이 전혀 없는지라 어쩐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무게와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오라버니를 뒤에 두고 섰다. 이제 내 앞을 막아선 채 두 팔을 펼쳐 날 보호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방 앞의 옥계는 몹시도 아득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기나긴 인생길로 끌고 가는 것만 같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서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잘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바람이 불다

나는 낭야왕씨(琅耶王氏) 가문의 사람이다.


어머니는 성상의 손위 친누이이자 태후께서 가장 총애하는 진민장공주다.


고모는 황후궁에 들어 왕씨 가문에서 배출한 다섯 번째 황후가 됨으로써 후족(后族, 황후의 친족)으로 존숭을 받는 왕씨의 영예를 이어갔다.


내 이름은 왕현이며 상양군주에 봉해졌다. 하지만 태후마마부터 태자비까지 모두 나를 ‘아무’라는 아명으로 부른다.


나는 어릴 때도 황궁과 재상부 중 어느 곳이 진짜 우리 집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어린 시절은 대부분 황궁에서 보냈고 지금도 봉지궁에는 내 침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아무 때고 중궁으로 달려가 어원에서 마음껏 뛰놀고 황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놀 수 있었다.


황제 폐하는 공주 없이 황자만 셋을 두었으며, 우리 어머니는 태후마마의 유일한 딸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태후마마의 품에 안겨 황궁으로 들어가 그 곁에 머물면서 외할머니, 어머니, 고모의 가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황자 폐하와 고모는 공주를 몹시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고모의 슬하에는 자융 오라버니 하나뿐이다. 황제 폐하는 태자보다 나를 더 어여삐 여겼다. 새카만 수염에 희고 보드라운 손을 가진 황제 폐하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그해에 새로 딴 귤을 먹여주고는 용포로 입을 닦아주었다. 또 상소를 읽을 때에도 나를 옆에 뉘어 재웠는데, 그러면 고모가 와서 나를 소양전으로 안고 가 봉황 침상에 재웠다.


태자비 사완여는 재색을 겸비했으며 정숙하고 온화하며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사 귀비 마마의 궁에서 나와 함께 거문고를 배운 적이 있었다.


사 귀비는 천하에 따를 자가 없는 거문고 명수로, 셋째 황자 자담의 어머니이지 완여 언니의 고모였다.


완여 언니가 아무리 현숙하고 상냥해도 결국 사씨 가문 출신이었다.


고모는 사 귀비를 비롯해 사씨 가문 사람이라면 다 싫어했는데, 그 중에서도 사 귀비의 아들인 셋째 황자 자담을 끔찍이 싫어했다.


나는 태자 오라버니와 둘째 황자 자율보다, 심지어 내 오라버니보다 자담이 훨씬 좋았다.


나와 오라버니는 어려서부터 입궁해 황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랐기 때문에, 종실 여자아이 중에서 나보다 더 황자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태후마마의 지극한 총애를 등에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었다.


그 당시 못된 꾀를 가장 많이 낸 사람은 내 오라버니였고, 말썽을 가장 많이 부린 사람은 태자 자융이었다. 태자는 몸이 약한 데다 괴팍하고 말수가 적은 둘째 황자 자율을 툭하면 못살게 굴었다. 가끔은 그런 태자가 꼴 보기 싫고 아니꼬워 자율 오라버니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결코 남과 다투는 법이 없던 자담이 가만히 다가와 나를 감싸며 시종일관 지켜주었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던 그 시절은 바람처럼 흘러가버렸다.


연창(延昌) 6년 중추절에 효목태후가 돌아가셨다.


국상(國喪)을 마친 뒤에도 나는 태후가 살아 계실 때처럼 날마다 만수궁으로 달려갔다. 나는 외할머니가 가장 아끼던 고양이를 안고 홀로 앉아, 외할머니가 내전에서 나오며 미소를 머금고 ‘아무야’ 하고 부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이 빠져 있을 때, 익숙한 두 팔이 뒤에서 나를 안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옷섶과 소매 사이에서 풍기는 옅은 목란 향이 내 세상에 가득 들어찼다.


“자담!” 나는 곧 몸을 돌려 그의 품 안에 뛰어들며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네가 울면 내 마음이 아파.” 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며 말했다. “나는 아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자담의 위로에 내 마음은 마치 샘물이 흘러간 듯 보들보들해졌다. 그러면서 가까운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점차 옅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열다섯 살이 되는지,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자담이 내가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사정을 모르는 황제 폐하가 다른 여인을 그의 비로 정하면 어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열다섯 살이 되어 계례를 올리기도 전에 사 귀비가 세상을 떴다. 세월조차 담묵으로 그린 듯 아름답던 그 여인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어머니를 잃었으니 그토록 큰 궁궐에 자담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직 어렸지만 황자에게 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사씨 가문과 왕씨 가문은 수년간 서로 맞서왔고, 황궁에서 고모의 최대 맞수도 사 귀비였다. 그러나 사씨 가문은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힘을 잃었다. 예로부터 낭야왕씨에 맞선 사람치고 그 말로가 좋았던 자는 드물다.


내가 우리 왕씨 가문이 문벌가의 우두머리로서 횡포한 권세를 휘두른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사 귀비 마마가 돌아가신 후였다. 고귀한 황자인 자담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조서 하나에 궁 밖으로 쫓겨났다.


고모가 이토록 횡포를 부리리라곤 짐작조차 못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인 자담을 치워버리고 싶어 하던 고모는 사 귀비가 눈을 감자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다.


내가 소양전 밖에 꿇어앉아 빌고 또 빌어도 고모는 뜻을 꺾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이는 고모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공주, 설령 오늘은 아무가 나를 원망하더라도 언젠가는 내게 감사할 날이 올 겁니다.”


비바람이 차다

이날 어머니와 내가 산간에서의 거처를 어떻게 하고 어떤 물건들을 가지고 갈지 상의하고 있을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경사를 뒤흔든 소식을 가지고 퇴청하였다. 바로 전쟁에서 승리한 예장왕이 며칠 뒤 경사에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전쟁 때문에 한참 속을 끓이던 아버지는 승전보를 듣고 오히려 담담해졌다. 다행으로 여기기는 하되 뭔가 걱정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오라버니는, 아버지는 남쪽 변방이 평정된 것은 기쁘되 예장왕의 이번 승리로 한족(寒族, 한미한 가문) 무인들의 권위가 더 강대해질 것을 염려한다고 했다.


황상이 막 등극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북방에서 돌궐(突厥)이 국경을 침범하고 남방에서 오랑캐가 소란을 일으켜 변방의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조정의 국고는 비어갔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각지의 관리들은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살길이 막막해지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터라, 결국 건안(建安) 6년에 10만 이재민이 난을 일으켰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황상은 각 번진(번진)의 장군들에게 난을 평정하라 명하였다. 이에 무장들은 전쟁을 기회로 힘을 키웠다. 한족 무인 세력이 군대를 기반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여 점차 권력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된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높은 작위와 권력으로 그들을 구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자는 병졸에서 장수가 되고, 장수에서 다시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성씨는 왕에 봉해질 수 없다는 선례를 깨고 당대 최초로 황실과 성이 다른 번왕(藩王)이 되었다.


그가 바로 예장왕 소기였다.


소기는 한족 무장 중에서 그 지위와 권세가 으뜸가는 사람이 되었다. 가문도 인맥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백골이 수두룩한 전장을 넘어 내 아버지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이립(而立, 서른 살)이었다.


적의 피로 철갑을 씻고, 손에 쥔 장검으로 창공을 겨누고 변경 각지를 가로질러 궁궐까지 비춘, 황족과 성이 다른 유일한 번왕이지 빛나는 전공을 세운 정국대장군으로 세인에게 악귀나 신으로 불리는 사람.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뜻이 없는지 갈수록 더 세차게 퍼부었다. 빗줄기가 가장 거세던 그날, 궁에서 고모가 나를 부른다는 전언이 왔다.


고모는 내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신분과 용모, 재능은 모두 가문이 준 것이며 이 가문이 없으면 나와 너, 더 나아가 자손들까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예를 누렸으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고모의 눈빛에 슬픔과 냉혹함이 담겼다.


“예장왕 소기가 장공주의 딸을 비로 달라고 했다.”


낭군을 만나다

내가 시집가는 날, 온 경사가 들썩거렸다.


혼례 내내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데 쓰이는 비단 부채를 치우려면, 신방에 신랑과 단둘이 남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그가 내 앞에 섰지만 나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그도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은촉(銀觸)이 높이 비추는 신방에 단정히 앉아, 신랑이 들어와 합근례(合巹禮, 신랑과 신부가 술을 나누어 마시는 절차)를 올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멍해 있다가 문득 밖에서 들여오던 음악 소리가 언제 멎었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시녀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것이, 그것이…… 예장왕께서…… 예장왕께서 방금 혼례식장에서 돌궐의 대군이 변경을 침범했다는 급보를 전해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혼례복을 벗어 던지시더니 곧바로 경사를 떠나 출정하시겠다고 합니다!”


새신랑이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전장으로 달려간 예는 없었던지라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남편 될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 채 신혼 첫날밤 홀로 신방에 버려졌다.


울분을 참고 나 자신을 희생한 대가가 이런 치욕이었다니!


변고가 생기다

지난 3년 동안 휘주에 처박혀 요양하며 신선처럼 유유자적 지낸 것도 다 나의 그 낭군 덕분이었다.


지내보니 숙부가 지은 이 별업은 참으로 별천지였다. 깊은 산속이라 고즈넉했고, 대나무가 쭉쭉 뻗은 사이로 샘 아래 또 다른 샘이 이어졌다. 아침에는 산중의 운무를, 저녁에는 아름다운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으며 뜰에는 푸르른 나무와 온갖 꽃이 자랐다. 깊은 못 위로 새들이 날아다니고 누각은 특별한 정취가 느껴졌다. 경사에서 흔히 보던 원림(園林)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봉황관을 내던지고 그의 부하에게 비단 끈을 가져가라 내주던 그 밤, 나는 끓어오르는 화에 원망까지 더해져 당장이라도 그와의 인연을 끊고만 싶었다.


그가 간곡한 어투로 진심 어린 사과를 담아 보낸 친필 서신은 하필 내가 몸져누워 있을 때 전해졌다.


그 후로 몇 달에 한 번씩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하면서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까지 보내왔다.


그에 대한 감정도 차츰 변했다. 처음에는 혐오스럽고 같잖기만 했지만, 이제는 익숙함을 넘어 이 데퉁스러운 무인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설마 내게 미안한 마음에 성심껏 마련한 금은보화로 나를 부양하는 것이 낭군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칠고 아둔하기가 시정 장사꾼이나 매한가지지만, 그 진심만은 높이 사줄만 했다. 서신이라고 해봐야 짧은 안부 인사가 전부였다. 늘 한 사람이 쓴 듯 비슷한 문장에 그의 관인을 찍었으니 가서(家書)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필체조차 그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개 무인인 그의 손에서 이토록 호방한 글씨가 나올 리 만무했다. 뭐, 이러나저러나 이것만으로도 그가 영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고 부부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거나, 어쩌면 양심의 가책을 약간이나마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란(賀蘭)

다그닥다그닥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한바탕 악몽을 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입에 천이 물려 소리조차 낼 수 없었으며, 눈앞은 어두컴컴하니 빛 한줄기 보이지 않았다. 이건 꿈이야. 악몽을 꾸는 것이 분명해. 깨어나야 해. 어서!

마차는 잠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밖에서 들여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물소리,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까지……. 그렇게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마차의 흔들림에 정신을 차리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추위와 허기는 더해갔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는데, 누군가 나를 일으켜 관에서 끌어내더니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내던졌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고 목구멍이 따끔거렸으며 옴지락거릴 기운조차 없었다.


눈앞에는 체구가 제각각이나 하나같이 북방 유목민 차림을 한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다. 모전(毛氈, 솜털로 짠 모직물)으로 만든 모자에 가려 생김새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건초를 깔아둔 축축한 땅바닥에 나를 내던졌다.


순간 집이 그립고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오라버니가, 자담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가족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용기도 커져갔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은 소기였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였다.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들여보내.” 익숙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 밖의 젊고 준수한 사내였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얼굴선은 깎아낸 듯 날렵하고 긴 눈썹이 비스듬히 위로 날아올랐다. 꽉 다문 얇은 입술에는 핏기하나 없었지만 형형한 두 눈만은 바늘 끝처럼 서슬이 퍼랬다. 그 눈이 내게 향하니 마치 얼음 침에 찔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긴 이가 바로 나를 납치한 비적의 두목이자 관 속에서 내 옆에 누워 있던 그 흉악한 악귀였다.


“마차에서 만져본 네 몸이 하도 부드러워 어찌 생겼나 보고 싶었다. ……과연 천하절색이구나. 소기가 여복이 있군.”


요사스러운 눈빛과 창기에게나 쓸 법한 말투라니, 그리하면 날 모욕할 수 있을 줄 알았나?


폐부가 울렁거리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한 말투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나를 죽이려거든 내 지아비 앞에서, 예장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직접 죽여라.” “네가 나를 북방으로 납치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지 않느냐?”


나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지는 것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십중팔구 내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기의 적이 분명했다. 그가 소기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원한에 찬 목소리로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나만 해칠 생각이었다면 천연회에서 단칼에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관에 숨기기까지 하면서 변경 근처 북방으로 데려왔다. 그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소기가 분명했다.


“왕비께서는 당신 낭군의 그 혁혁한 전공들이 어찌 세워졌는지 아는가? 예장왕의 영예가 얼마나 많은 원혼과 백골을 쌓으며 이루어졌는지 아는가 말이다.” 살아남은 하란씨의 한 명일 그는 몸을 기울여 나를 노려보았다. 번뜩이는 칼날 같은 눈빛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 무섭기까지 했다. “나라가 망하는 날, 3백여 명이나 되는 왕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갓난아이조차 살려두지 않았지! 백성들은 모조리 그놈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개미 새끼들처럼 짓밟혀 죽었단 말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

수천 개의 화살이 사방에서 이곳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은 시위에 매겨지고 검은 칼집에서 나와 있으며, 쇠붙이의 날카로운 날에 굴절된 서늘한 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소기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삽시에 쥐 죽은 듯 고요가 내렸다.


“예장왕, 그간 잘 지냈소?” 하란잠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랭했다.


“하란 공자, 오랜만이오.” 소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란잠을 차갑게 훑어본 뒤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기는 하란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만을 응시했다.


나는 그를 제대로 보려고 애썼지만 갑자기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3년 만의 첫 만남이 하필 이런 식이라니……. 지금 그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왕비? 아내? 아니면 그저 장기짝……? 이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뜻에 내 생사가 달려 있을 따름이었다.


애증愛憎

“약을 이리 주거라.” 소기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모두 물러가라.”


휘장이 걷어지며 소기가 침상가에 앉았다. 바로 내 옆에.


갑자기 어깨가 서늘해졌다. 소기가 이불을 들춘 것이었다. 소기는 내 속옷의 깃을 들추고는 손가락으로 어깨 부위의 상처를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살에 닿는 느낌에 흠칫 몸이 떨렸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머리로 몰리고 두 볼이 홧홧 달아올랐다. 소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놀렸다. “자면서도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군.”


부끄럽기도 하고 노여움이 일어 그의 손길을 피하고는 이불로 가슴을 가렸다.


나는 눈썹을 치키고 그를 바라봤다. 지난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몇 마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숱한 감정이 가슴속에 들어찼다.


“당신을 증오해요.”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귀 뒤가 홧홧했다.


나는 그의 미소 띤 얼굴을 보고 성을 내기는커녕 같이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입을 뗐다. “당신에게 빚진 것이 있는데 지금 돌려드릴게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미소는 거두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오?”


나는 그에게 몸을 가까이 하고는 눈썹을 치키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뺨을 후려쳤다.


“고맙소, 왕비.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소.”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저릿한 내 손바닥을 잡아 뒤집더니, 붉게 부어 오른 손바닥을 보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이미 있던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새 상처가 생겼구려.”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을 보았다. 맙소사! 그제야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흰 살결을 그 앞에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고개 돌려요!” 부끄러움에 머리가 하얘질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에게 붙들린 두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는 몹시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사나우니…… 잘됐군. 무장의 아내가 될 운명이었겠소.”



황궁, 뒤집어지다

진퇴進退

이 모든 일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을바람이 산들 불고 가랑비가 내리던 경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더랬다. 그랬던 경사가,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내 가족이…… 이제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 천지까지도 모두 이 분쟁으로 무너질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어쩌면 이 일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황당하고 두려운 모든 일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어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라…….” 그는 담담히 내 물음을 곱씹더니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달리 무엇 때문이겠소. 제왕(帝王)의 패업(霸業)을 이루기 위해서지.”


“일단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승자가 아니면 패자가 될 때까지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되돌아갈 방법은 없소.”


놀랍게도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를 바라보며, 이 순간 내 마음속에 떠오른 말을 담담히 내뱉었다.


“기왕지사 부부가 되었으니…….” 나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어디라도 당신과 함께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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