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미술관
미술관에 들어서며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7가지 의문
미술품은 왜 도난당하는가?
누가 미술품을 훔치는가?
의뢰를 받고 미술품을 훔치는가?
범인들은 훔친 미술품을 어떻게 할까?
미술품 도난으로 누가 이득을 얻는가?
도난 미술품을 누가 구입하는가?
도난 미술품은 금고에 숨겨져 있을까, 아니면 돈이 남아도는 누군가의 집 벽에 걸려 있을까?
도둑맞은 미술품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된 미술품 절도 범죄는 도둑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특히 매력적인 분야이다. 미술품은 저항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운반하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초, 미국연방수사국(FBI)은 매년 전 세계에서 도난당하는 미술품의 가치가 40~6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미술품 절도는 전 세계에서 마약 밀매, 자금 세탁, 무기 암거래에 이어 네 번째로 규모가 큰 범죄 유형이 되었다.
-범죄 동기
세상에서 널리 인정받는 미술 작품에는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이는 곧 도난 범죄의 동기가 된다. 그 밖의 다른 동기로는 편의성과 이동성이 있다. 그림을 비롯한 소형 조각, 각종 유물은 대개 운반하기 쉽고 몰래 차에 실거나 감추기에도 용이하다.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기 전에 공립 박물관 혹은 민간인의 집에 걸려 있던 미술품을 빼돌릴 수 있는 것이다. 공공기관 소장품이든 민간 소장품이든 미술품이 도난당한 사건은 그다지 상세하게 보도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사관들은 대개 도난맞은 작품이나 수상한 활동을 기민하게 목격한 미술품 거래상과 일반인의 신고에 주로 의존한다. 일반 대중의 신고는 이런 유형의 범죄를 예방하거나 적어도 범죄의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
세계 최대의 도난 미술품 데이터베이스인 ALR(도난 미술품 등록부)은 도난 미술품의 거래를 억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도난을 예방한다. 미술품을 도난당한 사람은 누구든 ALR에 연락할 수 있다. 도난 미술품이 목록에 등재되면 합법적인 미술품 시장에서 판매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다. 품격 있는 경매장, 갤러리, 박물관 그리고 구매자들은 도난품으로 의심되는 작품이 등장할 때마다 ALR에 문의하고 경찰에 알린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에는 광범위한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1세기 초에 일어난 나폴레옹전쟁과 2세기 중반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대규모 미술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은 훗날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발견되었고, 때로는 그렇게 발견된 작품을 되찾기 위해 원래 소유주의 후손들이 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도둑맞은 미술품은 종종 실제로 팔리기도 한다. 훔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취급하고 소유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부도덕한 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계에서는 이런 비밀 수집가들을 "장물아비(gloaters)"라고 부른다. 어떤 작품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숨겨진다. 훔친 작품을 둘러싼 소동이 가라앉아 은밀하게 거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파기되기도 한다. 작품이 너무 유명해서 그 작품의 도난을 둘러싼 소문이 영원히 가라앉지 않으리라고 도둑이 판단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때로 범인들은 미술품을 협상의 도구로 사용한다. 기소당한 범죄자의 형량을 줄여달라고 흥정하기 위해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다.
-미술품의 가치
미술품의 값이 비싼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누가 그 작품을 원하는가, 누가 제작했는가, 과거에 누가 소장했는가와 같은 다양한 요인에 따라 가치가 올라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부유한 권력자들은 종종 자신의 부와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미술품을 구입한다. 따라서 미술품의 가격은 사회적 지위나 명성과 관련이 있다. 또한, 미술품의 명성은 유행의 영향을 받는다. 유행은 작품이 대중매체에 소개되거나 대규모 전시회에 등장하거나 다른 예술가의 비슷한 작품이 인기를 얻는 데서 비롯된다. 미술품 시장에는 상승기도 있고 하락기도 있지만 1960년대 이후로는 상승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미술품 가격은 거의 매달 최고가를 기록한다.
미술 작품의 가치가 급락하는 일은 드물다. 보통 이런 일은 화가의 생전 또는 사후에 그 화가의 평판이 나빠지면 일어난다. 미술품 도둑에게는 불리한 일이다. 하지만 작품이 도난당한 사실이 공표되면 작품의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상승하기도 한다. 1503-1506년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모나리자>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는 1911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이었다. 범인은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지아였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애국자로서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에 <모나리자>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결국 <모나리자>는 1914년에 파리로 돌아갔다. 도난당했다가 다시 되찾는 과정에서 <모나리자>는 특별한 그림이 되어 유명세를 얻고, 도난 사건을 소재로 한 오페라 1편, 영화 2편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손꼽힌다. 도난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문으로 인해 미술품의 가치가 높아지면, 절도범이 그 작품을 판매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페루지아는 2년 동안 <모나리자>를 숨겨놓고 도난의 여파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1913년 12월, 작품을 판매하려고 시도했지만 거래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회수
미술품 도난은 규모가 작은 사건도 있고 큰 사건도 있으며, 개인이 저지른 절도도 있고 범죄 조직이나 군대 전체가 동원된 약탈도 있다. 이 책은 지리적으로나 연대적으로나 아주 넓은 범위의 미술품 절도 사건들을 다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술품과 유물은 대부분 아직도 회수되지 못했다. 일부 작품은 개인의 집에 걸려 있거나 파손되었을 것이다. 범인들은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끝내 밝히지 않고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갔다. 미술품 도난은 대개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공공 및 민간 국제기구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단서를 추적 중이다. 일부 사건에는 미술품 회수와 범인 체포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여전히 보상금이 걸려 있다.
국제경찰 조직 인터폴은 도난당해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미술품 2만 5,000점의 목록을 보유하고 있다. 인터폴, FBI 미술품 범죄 전담팀, 런던 광역 경찰청의 미술·골동품 부서, 뉴욕 경찰국의 특수사기 수사팀 등 여러 기구에서 도난 미술품을 계속 조사하고 작품을 되찾아 주인에게 돌려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잃어버린 미술품
나치의 예술품 대량 약탈
DATE: 1933-1945년
PLACE: 독일·유럽 전역
STOLEN: 클림트, 반 고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작품 포함 65만여 점
히틀러가 이끈 나치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1939-1945)에 인류를 대상으로 저지른 잔인무도한 범죄로 악명이 높다. 그러한 나치의 횡포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바로 문화유산에 대한 광범위한 약탈이다. 나치는 주로 유대인에게서 유물과 미술품을 약탈했지만, 독일이 점령했던 여러 나라의 미술관과 박물관, 교회와 궁전, 민간인의 집에서도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퇴폐 미술
나치 이데올로기는 예술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히틀러는 실패한 예술가였다.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입학을 거부당한 뒤로 그는 당대의 성공한 화가들을 시기했다. 그의 미술 취향은 단조롭고 폭 좁은 구상화 양식에 국한되었다. 그런 미술 양식이 순수한 아리아인 혈통에 관한 자신의 이상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그는 현대 미술과 추상미술을 "퇴폐적"이라고 폄하했는데, "퇴폐"란 그가 자신의 좁은 견해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비난할 때 사용한 용어였다. 특히 그는 유대인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혐오했다. 스스로 미술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그는 1925년에 출간한 자서전이자 선언문인 《나의 투쟁》(동서문화사, 2014)에서 현대미술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1933년 독일 총리가 되고 나서 그는 자신의 미적 이상을 나라 전체에 강요하면서 독일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2만 점에 달하는 "퇴폐적"인 미술품을 모조리 팔아버리거나 파괴하라고 요구했다.
공공 소장품, 민간 소장품, 개인 소장품
나치는 국가가 운영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빼앗고 나서 민간 수집가의 소장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모두 재산을 박탈당했다. 나치는 작품을 직접 가져가기도 하고, 쿤스트슈츠(Kunstschutz)라 불리던 "미술품 보호" 특수부대를 내세워 작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나치 군대는 다른 나라를 침공하거나 점령할 때도 미술품을 약탈했다. 오스트리아, 폴란드,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우크라이나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과거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도 미술품을 훔쳤고, 우피치 미술관과 피티 궁전에서 피렌체의 미술품 컬렉션 절반가량을 가져갔다.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맺은 나라인 소련에서도 독일군은 문화센터와 박물관, 궁전, 대성당 등을 털어 미술품과 유물 수십만 점을 빼앗아 갔다. 로스차일드, 로젠버그, 빌덴슈타인, 슐로스 가문과 같은 유대인 명문가에서도 고가의 미술품 컬렉션들을 몰수했다.
풍부한 문화예술 유산을 가진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에 합병된 이후로 나치의 미술품 약탈의 주된 피해국이 되었다. 빈 분리파(18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예술 사조로 생활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했다-옮긴이)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는 뚜렷한 표적이었다. 그가 1903년에서 1907년 사이에 제작한 《아델레 블로호바우어 1세의 초상》은 1941년 블로호바우어 저택에서 압수당했다. 성적인 주장을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의 작품은 나치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았는데도 약탈의 표적이 되었다. 실레가 1912년에 제작한 《발리 노이질의 초상》은 어느 유대인 미술상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미술상은 1938년 나치 당원이었던 미술상 프리드리히 벨츠에게 그 작품을 강제로 양도한 뒤 나치의 아리아화 프로그램을 피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법적 분쟁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는 대부분 법적 분쟁이 뒤따랐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호바우어 1세의 초상》은 오랜 기간 큰 비용을 들여 진행된 소송 끝에 2006년에야 아델레 블로호바우어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오른쪽 사진)에게 반환되었다.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2010년 9월 스위스-독일 국경에서는 세관원들이 취리히에서 뮌헨으로 여행 중인 한 남자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치를 위해 일했던 미술상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인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였다. 그는 막대한 현금을 운반 중이었는데, 그 현금이 베른에서 미술품을 판매하고 받은 돈이라고 주장했다. 독일 경찰은 세금 포탈을 의심해 그의 배경을 조사했다. 2년 뒤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숨겨둔 1,500점 이상의 미술품 컬렉션이 발견되었다. 현재까지는 그중 나치의 약탈품으로 입증된 작품이 몇 점밖에 되지 않지만, 조사는 여전히 계속된다
되찾은 미술품
도난이 완성한 미술의 아이콘
DATE: 1911년 도난, 1914년 회수
PLACE: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STOLEN: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1911년,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의 화가, 제도사, 기술자, 과학자, 이론가, 조각가,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작품이다. 제작 연도는 1503-1506년경으로 추정되지만 1517년경까지 작업이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모나리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조용히 걸려 있었다. 그러다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던 29세의 이탈리아인 잡역부 빈첸초 페루지아가 근무를 마치고 청소 도구 보관함에 숨어들었다. 박물관이 문을 닫자 슬며시 빠져나온 그는 조심스럽게 나무와 유리로 된 액자를 벽에서 떼어내고, 그림을 액자에서 빼낸 뒤 작업복으로 감쌌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려 하던 그는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했지만 운 좋게도 지나가던 배관공이 그의 모습을 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다음 날 박물관 직원들은 《모나리자》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수 작업이나 사진 촬영, 타 박물관 대여 등의 이유로 그림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빈 벽을 본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 한 큐레이터가 《모나리자》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는데 아무도 확실한 답을 못하자 작품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림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잡지와 신문은 《모나리자》의 사진을 1면에 실어 대서특필했고, 형사들은 루브르 박물관 곳곳을 뒤지며 지문을 채취하고 목격자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심문했다. 차량과 보행자, 심지어 증기선 승객들까지 검문소에서 멈춰 세워 수색했다. 경찰은 프랑스 국내는 물론이고 국경 너머까지 수배 전단을 배포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일주일간 문을 닫았는데, 다시 열었을 때는 관람객 수천 명이 몰려왔다. 모두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빈 벽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
고강도 수색이 이루어졌지만, 경찰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페루지아는 《모나리자》를 자기 숙소에 2년간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다 1913년 12월에 작품을 구매할 사람을 찾은 그는 "레오나르도"라는 가명을 사용해 피렌체의 호텔 방에서 한 미술품 중개인을 만났다. 중개인은 우피치 미술관 관장과 함께 왔다. 두 사람은 페루지아가 여행 가방에 설치한 이중바닥 밑에서 《모나리자》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개인과 관장은 그 그림을 구입하기로 합의하고서는 곧바로 당국에 신고했다. 다음 날 아침 페루지아는 호텔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전에 모나리자 절도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당시 경찰은 그가 주요 용의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를 마치고 1914년 1월에 드디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페루지아는 절도 혐의로 기소되어 이탈리아에서 재판을 받았다. 증인 도중 그는 그림을 훔친 동기가 애국심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모나리자》가 나폴레옹 통치기에 자신의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약탈당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실로는 레오나르도가 1516년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모나리자》를 가져갔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그 그림을 합법적으로 구입했다. 페루지아는 징역 1년 15일을 선고받았으나 7개월만 복역하고 항소로 석방되었다. 훗날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이탈리아 군대에서 싸웠고,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 살다가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페루지아의 절도는 《모나리자》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최소 12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왔다. 그림 속 인물의 신비로운 미소, 방 안의 모든 이를 따라다니는 눈빛, 포개진 손, 눈썹이 없다는 점, 배경의 원근법, 작품의 크기, 신비로운 분위기, 스푸마토 기법 등에 관한 칼럼이 쏟아졌다. 곧이어 《모나리자》는 그림, 판화, 광고, 엽서, 책, 노래, 영화 등에 등장하며 최초의 대중적인 예술 아이콘이 되었다. 현재 《모나리자》는 온습도가 조절되는 상자 안에 보관되며 겉에는 방탄유리를 설치했다. 박물관 경비원들은 가까이서 그림을 지킨다. 매년 1,0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하는데, 대부분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를 보러 온다.
스키 마스크를 쓴 대낮의 무장 강도
DATE: 2008년 도난, 2012년
회수 PLACE: 스위스 취리히, 뷔를레 재단 박물관
STOLEN: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외 모네, 반 고흐, 드가의 작품
2008년 2월 10일, 밝은 대낮에 스키 마스크를 쓴 남자 셋이 스위스 취리히의 E. G. 뷔를레 재단 박물관에 들어섰다. 한 남자가 총을 꺼내 박물관 직원과 관람객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하는 동안, 다른 두 남자는 전시실로 들어가 문에서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그림 4점을 훔쳤다. 세 남자는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1명은 슬라브어 억양이 섞인 독일어를 사용했다. 몇 분 뒤 그들은 박물관을 빠져나와 흰색 밴을 타고 도주했고, 겁에 질린 관람객과 직원들은 여전히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도둑맞은 그림 4점은 유리 진열창 안에 전시되어 있었고, 그림에 범인들의 손이 닿자마자 보안 경보가 울렸다. 4점 모두 높은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 작품이었다. 작품 제목은 각각 폴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 근처의 양귀비밭》, 반 고흐의 《꽃이 핀 밤나무》, 에드가 드가의 《뤼도비크 르픽과 그의 딸들》이다. 이 사건은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미술품 절도 사건이었고 스위스 역사에서 이보다 큰 미술품 절도는 없었다.
범인들은 그림을 신중하게 선별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림들을 무작위로 가져간 것처럼 보였다. 당시 그 그림들은 금전적 가치가 1억 8,000만 스위스 프랑(현재 가치로 약 2,900억 ? 옮긴이)에 달했지만, E.C.뷔를레 재단 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비싼 작품들은 아니었다.
뷔를레 재단에서 도난당한 그림 4점은 다행히 모두 회수되었다. 모네의 <베퇴유 근처의 양귀비밭>과 반 고흐의 <꽃이 핀 밤나무>는 강도 사건이 일어난 지 8일이 지난 2008년 2월 18일, 인근 정신병원 영내에 주차된 차량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은 2년 뒤인 2012년 4월 12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회수되었으며, 드가의 <뤼도비크 르픽과 그의 딸들>도 같은 달에 되찾았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도둑들이 캔버스를 액자에서 억지로 떼어내면서 생긴 약간의 손상이 있었다.
그해 세르비아에서 이 절도 사건과 관련해 4명의 남성이 체포되었다. 경찰이 도주 차량을 발견한 뒤 수사를 스위스 밖으로 확대하면서 그들의 행적이 드러난 것이다. 스위스와 세르비아 수사기관은 "조끼"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6개국에서 온 30여 명의 수사관과 방대한 비밀 요원 네트워크가 동원되었는데, 비밀 요원들은 전화를 감청하고 용의자들의 동선을 추적하는 등의 감시 작전을 수행하며 작품의 최종 회수를 위해 함께 노력했다.
미술관을 나서며: 빈 액자에 걸려 있는 것
미술품을 훔친 범죄자들은 대부분 미술계를 잘 알지 못하고 미술의 역사에 무지하다. 화가들의 기법이나 재료, 생애나 배경은 더더욱 모른다. 그저 미술품이 비싸지만 손에 넣기는 쉬운 물건이라고만 생각한다. 작품을 벽에서 거칠게 뜯어내고 액자에서 잘라내는 것만 봐도 절도범들은 미술품의 가치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미술품을 도둑맞는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일부를 빼앗기는 일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미술품 절도는 이제 규모가 큰 사업이자 세계적인 범죄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도난당한 미술품 중 10퍼센트 정도만이 회수되고 있다. 인터폴, FBI 미술품 범죄 수사팀, 런던 광역 경찰청의 미술·골동품 부서 등 여러 나라에서 미술품 도난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경찰 조직이 운영되고 있다.
간혹 개인이 직접 법적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예컨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난민 마리아 알트만(본명은 마리아 빅토리아 블로호, 이후 블로호바우어로 개명)은 그녀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게 빼앗긴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5점을 되찾기 위해 직접 소송에 나섰다. 전후에 이 그림들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그중에는 알트만의 고모인 아델레 블로호바우어의 초상화도 2점 있었다. 결국 2006년에 오스트리아 정부가 알트만을 비롯한 가족 상속인들에게 5점의 그림을 모두 반환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을 계기로 역사의 격동 속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진 전 세계 미술품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예술은 우리의 탈출구다. 따라서 위대한 미술품의 도난 사건은 우리에게 복잡한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1911년, 도난맞은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벽의 빈자리를 보려고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와 줄을 선 사람들이 이를 입증한다. 보스턴의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던 도둑맞은 미술품과 유물 13점의 자리는 지금도 여전히 비어 있다. 그 빈 자리에는 언젠가 작품들이 회수되고 다른 수많은 도난 미술품도 제자리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