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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사회

저   자
줄리언 바지니(역:오수원)
출판사
예문아카이브
가   격
10,000원(128쪽)
출판일
2018년 08월
도서정보


■ 책 소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리는 시대다. 미디어는 검증되지 않은 뉴스를 쏟아내고 그것들은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진다. 아예 일부러 ‘가짜 뉴스(fake news)’를 생산해 유포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의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려 하는 심리를 이용한 이 같은 가짜 뉴스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지금 이 순간도 인터넷 네트워크를 종횡무진 누빈다.

 

이미 2016년에 옥스퍼드 사전은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하면서 탈진실 현상이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의 특성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사실과 진실은 무시되고 그 자리를 감정과 욕망이 대신한다. 더욱이 진실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두려움과 무관심이 결합해 증오를 낳고, 아집과 독선이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심지어 진실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다양한 의견만이 존재한다는 언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진실사회》는 탈진실이 사회적·정치적 이념이 아닌 위대한 미래를 향한 자기반성이 되기를 갈망하며 출간된 책이다. ‘탈진실’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는 것은 오히려 진실에 대한 갈망이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책에는 “진실은 힘이 세다”는 명제가 다시 제대로 확립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다.

 

■ 저자 줄리언 바지니
영국의 철학자, 저술가, 칼럼니스트. 런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 계간지 〈필로소퍼스매거진(Philosopher’s Magazine)〉 편집장 겸 발행인이다. “작은 생각이 커다란 통찰력을 키운다”라는 슬로건으로 ‘미시철학(Microphilosophy)’을 주창하면서 낙태, 젠더, 전쟁에서부터 종교, 이성, 실존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제로 전방위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대중 철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다. 〈가디언(Guardian)〉〈인디펜던트(Independent)〉〈옵저버(Observer)〉 등 영국 유력 언론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BBC의 인문학 토론 프로그램 〈우리 시대(In Our Time)〉의 고정 패널이다.

 

지은 책으로 《위기의 이성(The Edge of Reason)》《자유의지(Freedom Regained)》《철학이 있는 식탁(The Virtues of the Table)》《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까?(Without God, Is Everything Permitted?)》《자아의 계략(The Ego Trick)》《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What’s It All about? Philosophy and the meaning of life)》《책은 표지로 판단해야 할까?(Should You Judge This Book by Its Cover?)》《가짜 논리(Duck That Won the Lottery)》《불만(Complaints)》《유쾌한 딜레마 여행(The Pig that Wants to be Eaten)》 등이 있다.

 

■ 역자 오수원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료 번역가들과 ‘번역인’이라는 공동체를 꾸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인문, 예술, 역사, 과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영미권 양서를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감시 국가(Does State Spying Make Us Safer?)》《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Ten Days in a Mad-house)》《악(On Evil)》《현대 과학·종교 논쟁(The Edge of Reason?)》《위대한 몽상가(The Great Pretender)》《포스트 캐피털리즘(Standing on the Sun)》《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실험 100(Science: A History In 100 Experiments)》《쌍둥이 지구를 찾아서(The Search for Earth’s Twin)》《비(RAIN)》《음악을 가르치는 예술가(The Music Teaching Artist’s Bible)》 등을 번역했다.

 

■ 차례
서론

 

종교적 진실
권위적 진실
은폐적 진실
이성적 진실
경험적 진실
창조적 진실
상대적 진실
권력적 진실
도덕적 진실
총체적 진실

 

결론

 



도서요약


진실사회


종교적 진실

기원전 600년 경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에 예언자 레히(Lehi)는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그곳을 탈출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부족 중 한 일차인 라마니트(Lamanite)를 이뤘다. 라마니트 족은 레히의 아들 이름을 딴 것으로, 그 후 다른 예언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금으로 된 판에 무명의 언어로 자기 민족에게 가르쳤던 역사와 교훈들을 적어놓았다. 기원전 400년 경 최후의 예언자였던 모로니(Moroni)는 오늘날의 뉴욕 주 웨인 카운티(Wayne County) 어느 곳에 그 금판을 묻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최후의 예언자 모로니가 재림해 조지프 스미스를 그 금판으로 다시 이끌었고, 3년 후에는 스미스에게 성스러운 계시를 이용해서 금판의 내용을 번역하라고 명했다. 마침내 1830년 <모르몬경(The Book of Mormon)>의 영문 번역본이 뉴욕의 팔미라에서 처음으로 판매됐다. 이 <모르몬경>이 바로 우리가 ‘모르몬교’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경전이다.


세계 인구의 99.8퍼센트(모르몬교를 믿지 않는 인구)는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모르몬경>보다 훨씬 더 많은 신뢰를 받는 경전은 많다. 그러나 그 중에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정한 신의 계시라고 믿는 경전은 하나도 없다. 그 각각이 있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계시를 받은 경전 하나 또는 여러 개가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경이로운 역설은 이제부터다. 대다수가 대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계시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역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의 입장을 갖는 것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거나 모순적이지 않으며, 모든 가능한 입장 주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 하나도 없다면 소수의 입장이 옳다고 봐야 한다. 모든 계시를 믿지 않는 무신론의 관점은 자신이 믿는 경전이 다른 이들의 경전과 다르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은 용케 피해갈 수 있겠지만, 신과 관련된 이 종교 게임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점이 잘못됐다고 주장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런 사태는 ‘탈진실’ 사회의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진실을 넘어 신이 제공하는 ‘영원한’ 진리를 여전히 믿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 하나는 진실이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넘쳐난다는 데 있다. 결국 계시 받았다고 추정되는 이 텍스트들은 대개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이는 이들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반적으로는 다행스럽게도 계시 받은 진리에 대한 집요한 믿음은 예상만큼 분열을 일으키거나 과학에 해악을 초래하지 않았다. 이들은 또한 대체적으로 다른 계시를 따르는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낙관적 태도를 보인다. 예컨대 많은 기독교도들은 예수가 실제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는지 여부에 관내 크게 개의치 않으며, 죽은 뒤 부활해 물 위를 걸었는지 그리고 문을 통하지 않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나타났는지 따위의 사건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 그의 부활이 단지 거짓말 같은 이야기 이상의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믿는다.


계시를 통한 진리에 대한 모든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 진보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 그러나 종료를 근절하려는 지나친 노력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생산적이지도 않다. 이상적인 태도는 무신론자나 종교인들 모두 이름값을 하는 종교적 진실이라면 무엇이건 나름의 특색이 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신학을 과학으로, 신화를 역사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이 특별해질 수 있는 까닭은 평범한 경험적 종류의 진실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진실을 평범한 경험적 종류의 진실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방어해내기는커녕 오히려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관해 말하기를 피해야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의 공존은 각자가 말하는 진실의 종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확산될 때라야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감소한다기보다 세계 갈등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받는 종교가 줄어들리라는 진정한 희망이 자라날 수 있다.


이성적 진실

1804년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이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진실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확립하게 될 실험에 착수한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로부터 212년 후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탈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이들의 발표는 제퍼슨의 실험이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듯 보였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실험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검증하고 있던 가설을 폐기처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점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 방법이나 가정을 재검토한 뒤 방법을 바꿔서 다시 실험에 착수한다. 하지만 경험상 이제 포기해야 할 합리성의 모델이 하나 있다. “이성이야말로 절대적 진리를 낳는 잠재력의 근원”이라고 보는 서양 철학의 유구한 전통이 그것이다.


근대철학에서 이 ‘낙천적 합리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위대한 사상가 두 사람이 바로 르네 데카르트와 베네딕투스 스피노자다. 이들은 합당한 주의력과 근면함만 있다면 모든 분야의 인간지식에서 수학에 버금가는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합리주의자들이 보기에 이성은 관찰보다 우월하다. 이성을 사용하기만 하면 단순한 외양 또는 감각으로 느낀 세계 이면을 캐냄으로써 실재를 있는 그대로 확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완고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이성의 힘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야심만만한 주장 대부분을 포기했다. 데이비드 흄은 18세기에 이미 합리주의의 근원적 결함을 밝혀냈다. 그에 따르면 순수이성이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해야 개념들 간의 관계뿐이었다. 예컨대 “1+1=2”라는 설명은 숫자에 대한 진리를 말하지만, 사물 두 개를 더했을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두 개의 사물이 서로를 없애버릴 수도, 하나로 융합될 수도,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이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


이런 이성은 최고로 좋은 이성이 아니라 최고로 순수한 이성일 뿐이다. 지나치게 순수한 이성은 순도 높은 알코올처럼 맛도 없어질뿐더러 독성을 띨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성은 논리뿐 아니라 경험, 증거, 판단, 미묘한 사유 그리고 애매모호함에 대한 민감성 등과 함께 작용할 때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이성을 바라보는 가장 합리적인 관점은 이성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는 것도 너무 끌어내리는 것도 아니다. 이성은 불완전한 사용자들이 쓰는 불완전한 도구다. 가능한 한 이성적이 되려고 노력하되 믿음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그 노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성이란 도구는 우리를 진리 가까운 곳으로 이끌도록 도와줄 수 있는 나침반과 같아서, 그것을 쓰는 방법과 목표지점을 제대로 알 때라야 진정한 도움을 제공해줄 수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할 때만 자신의 인지적 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성을 활용하는 영리한 동물인 인간만이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빠질 수 있는 비이성과 불합리의 덫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덫을 능숙하게 피할 가능성 또한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경험적 진실

르네상스 시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자 과학자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론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과학 실험법의 근간을 확립한 사상가로 지금까지도 널리 칭송받고 있다. “실험을 제외한다면 경험에 의한 증명이야말로 단연코 최상의 증명이다.”


어느 날 베이컨은 왕의 주치의 한 명과 마차를 타고 런던의 하이게이트까지 가다가 주변에 온통 깔린 눈이 소금 못지않게 고기를 보존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불현듯 떠올린다. 베이컨은 지체 없이 자신의 가설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왕의 주치의를 데리고 하이게이트 힐 인근에 살고 있던 가정집을 찾아들어가 암탉 한 마리를 산 뒤 안주인을 시켜 내장을 빼내고 닭의 속을 눈으로 채우게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극도의 오한을 느낀 베이컨은 감기에 걸려 집으로 갈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결국 근처에 사는 애런델 백작이 그를 자신의 집에서 묵도록 배려했지만, 불행히도 축축한 침대를 쓰게 했던 바람에 감기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베어컨은 안타깝게도 폐렴으로 사망했다.


베이컨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간주되는 원인이야말로 경험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 접근법을 채택하는 일이 애초에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수백 년 동안 민간에 전승돼오던 지혜는 “추위로 감기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 증거를 검토한 현대 과학의 결론은 이것이 실없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감기의 원인은 리노바이러스, 독감의 원인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폐렴의 원인은 세균인 박테리아다. 기온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추우면 감기에 걸린다.” 세월이 흘러 2015년 1월, 이 같은 포제가 신문과 잡지를 버젓이 장식했다. 앨런 폭스먼이 이끄는 예일대 연구팀이 “리노바이러스에 대한 선천적 면역 반응이 심부체온에 비해 더 낮은 체온에서 약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가 콧속에 있느냐의 여부는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해당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반응은 온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추우면 감기에 걸릴 확률이 실제로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증거를 기반으로 한 진실의 신뢰성을 입증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특정한 인물이 사망한 이유를 묻는 역사적 질문에 대해서도, 죽음 일반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과학적 질문에 대해서도, 견고하고 최종적인 결론에 이를 만큼 충분한 증거는 없다. 우리는 늘 증거를 찾지만 대개 증거는 잡히지 않거나,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막연할 뿐 확정할 수 없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검증을 받아야 할 상황에 늘 열려 있고, 그렇게 검증을 통과한 진실은 더 믿을 만한 것이 된다. 경험적 진실의 강점은 그것이 꼼꼼한 검토와 교정과 반박에 부단히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험이 진실을 향한 매개체라는 경험주의 원칙을 “보여야 믿는다”는 설명의 오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변 세계와 관련해서 알고 있는 온갖 종류의 진실을 신뢰하는 기반은 내 눈 앞에서 분명히 일어난 듯 보이는 현상들이 아니라, 내가 목격한 적 없는 과학 실험이다. 동일한 장면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을 추가한다고 해도 그 경험이 더 강력한 경험적 진실이 되지는 못한다.


의학의 괄목할 만한 진보를 비롯한 근대 과학의 성공은 경험적 방법을 지혜롭게 활용한 덕에 이뤄진 것이다. 경험적 방법이야말로 진실의 창고를 넓힌 주인공이다. 단, 그렇게 된 이유가 경험적 지식이 100퍼센트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향해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경험적 진실은 확실성을 주장하기에는 지나치게 겸허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경탄스럽다.


창조적 진실

2005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 선상에 서서 이라크에서의 “임무가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딱히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실제로 한 발언은 “이라크는 해방되었다”, “우리는 숨겨진 생화학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라크 국민의 국민에 위한 국민을 위한 새 정부를 설립하는 새 지도자들과 같은 편이다”라는 것이다.


부시의 의도를 표현한 선언이 사실에 대한 기술로 오해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9.11테러가 터진 지 11일 후 양원합동회의가 열리기 전 부시는 세상을 향해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은 곧 테러리스트 편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위의 말을 하기 바로 전에 말했던 문장을 살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세계 모든 국가들은 이제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발언을 통해 부시가 한 일은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창작이었다. 그는 각국이 자신과 한 편이거나 적 둘 중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진실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말 때문에 진실이 바뀌듯, 새로운 진실로 인해 말이 바뀌기도 한다. 동성 커플이 결혼할 수 있게 되자 ‘결혼’의 의미가 변화ㆍ확장됐고 이는 결혼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창출했다. 진실은 늘 창조되고 있으며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현실을 변화시킨다. 경제 불평등에 대한 진실은 엄격한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창조에는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상상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실을 만들어내는 창의성’이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완곡어법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악명 높은 최근의 사례는 도널드 트럼프의 ‘악의 없는 과장’에 대한 옹호다. 과장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윤활유의 일종이다. 사람들은 일화를 윤색해 더 흥미롭게 만들려 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과장해 말하며, 윗사람에게 아첨을 하거나 그저 기분 좋자고 아랫사람에게 과도한 칭찬을 퍼붓기도 한다. 이런 선의의 거짓말을 ‘불완전한 진실’이나 ‘하얀 거짓’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저 쉽게 ‘회색 진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매몰차게 들릴 수 있겠지만, 없다. 일부 거짓말은 실제로 무해하다. 심지어 이로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악의 없는 과장’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이다. 그것은 그저 ‘거짓말이긴 하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라고 말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진실을 창의적으로 날조할 수 있는 다수의 방식을 인식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정치인들은 늘 거짓말을 일삼는다고 비난받지만, 아주 멍청하지 않은 이상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정치인은 극소수다. 이는 논쟁이 험담과 욕설과 거짓말의 현장, 미사여구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과거 사건들을 논란의 초점으로 삼는 것보다 어떤 진실이 ‘날조되고 있는 중’인지에 집중할 때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과거의 진실은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의 진실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권력적 진실

지방은 인간이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물질 중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요소다. 어쨌든 수십 년 동안 주류의 견해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이 견해가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밝혀지고 있다. 포화 지방이나 트랜스 지방 함량이 높은 식단이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정제된 탄수화물, 특히 설탕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위해를 가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의학 전문 지식을 신뢰할 수 없는 근거로 이 같은 정보의 역전을 지적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증거에 기반을 둔 영양 관련 조언은 발견되는 내용이 많아질수록 계속 바뀌고 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의 지식이 그래야 하는 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징후다.


게다가 지식의 이런 진보는 “과학자들은 늘 생각을 바꾼다”라는 부정적 고정관념이 시사하는 바보다 더 온건하게 진행된다. 예컨대 1933년에서 2014년 사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에서 섭취하는 열량이 각각 어느 정도여야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지에 대한 공식적 권고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세부적인 내용은 바뀌었지만 제대로 된 음식, 통곡물, 신선한 과일을 많이 섭취하라는 근본적 권고는 수십 년 동안 일관성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해도 지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난 2016년, 설탕연구재단이 1960년대 하버드대학교에 소속된 세 명의 과학자를 매수해 심장병의 원인으로 설탕 대신 포화 지방을 겨냥하도록 사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지방 가설’이라는 새로운 정석이 되어 1980년 발간된 미국 정부 최초의 영양 지침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정작 설탕업계가 과학에 끼친 영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업계가 이런 영향력을 직조하는 방식에 끼친 영향력이었다. 식품 제조업체들은 지방이 주는 부정적 연상을 십분 활용해 자사 제품에 ‘저지방’ 혹은 ‘무지방’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 딱지 덕분에 제품이 더 건강해지기라도 했다는 듯 팔아치웠다. 잘못된 지방 관련 정보를 이용하는 식품업계가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냉소의 결정판은 정상 지방이 함유된 비슷한 다른 제품보다 훨씬 더 많은 설탕이 함유된 저지방 케이크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작가 이안 레슬리의 말대로 이 지방 신화를 전적으로 ‘기업’이라는 괴물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영양학은 틀렸지만, 여기에는 다른 종류의 권력이 관련되어 있다. 사건의 출발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치의가 대통령에게 심근경색이 왔다고 발표했던 1955년이었다. 주치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줄이라는 영양학자 안셀 키즈의 권고에 동의했다. 키즈는 지방 가설의 주도적 옹호자였고 아이젠하워의 공개적 지지를 받아 영양학 분야에서 권력을 강화시켜나갔다.


키즈는 카르시마 넘치고 단호하며 힘이 넘치는 인물이었던 데 반해, 그의 입장을 반대했던 주된 상대인 존 유드킨은 온화한 태도의 소유자였고 정치 투쟁에도 문외한인 인물이었다. 요컨대 과학은 생각이 바르지 않은 과학자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쥐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진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힘을 가졌다는 뜻이고, 이런 이유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실을 직조하고 싶어 한다.


미셸 푸코는 진실과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 내렸다. “진실은 그것을 생산하고 지탱하는 권력 체제와의 순환적 관계와, 진실이 유발하고 진실을 확대하는 권력의 효과와 연계되어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의 기준에 따르자면 이 같은 결론의 함의는 진실의 개념을 장악해 그것을 누군가의 손아귀에 쥐어주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 된다. 푸코의 주장은 그것을 세계의 권력의 실제 역할을 참되게 기술하고 있다고 볼 때라야 비로소 설득력을 얻게 된다.


권력의 표명에 불과한 것이 아닌 진실이 존재한다는 태도를 채택할 때만 권력이 진실을 왜곡하는 행태에 저항할 수 있다. 권력이 진실을 빈번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진실이 곧 권력이라고 보는 견해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권력을 향해 진실을 외쳐댈 수 있는 것은 진실이 권력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익을 도모하는 권력자들이 말하는 진실의 실상이 폭로될 때마다 결국 권력과의 싸움에서 승자는 진실이라는 것, 진실이 늘 권력의 하인 노릇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도덕적 진실

사실과 관련된 문제에 한정 지어 살펴보자면, 시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구식 절대주의와 신식 상대주의 사이의 진실 공방에서 승자는 대개 구식 절대주의다. 사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위나 확실성을 얼마나 의심하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사실은 사실’ 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치의 문제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치문제에서는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어떤 면에서 이런 현상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옮겨간 사회적 변화의 결실이다.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이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 손 들고 판단 자체를 단념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다. 도덕적 사실은 정의와 발견 자체가 어렵다. 사실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관찰과 증거에 호소하면 된다. 그러나 살인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도대체 어떤 경험적 발견으로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름(wrong)'은 경험적 입증 대상이 되기에는 애초에 잘못된 종류의 범주다.


데이비드 흄의 인상적인 명제로 확립된 제3의 길이 있다. 흄의 명제는 이것이다. “이성은 정념(passion)의 노예이며, 노예일 수밖에 없다.” 흄이 생각하기에 도덕은 합리적 논쟁이나 경험적 입증이 아니라 동류의식, 다시 말해 ‘공감 능력’에 뿌리박고 있다. 살인이 그르다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안을 보는 능력, 즉 생명을 빼앗기는 일은 삶의 가장 큰 가치를 빼앗기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논리적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도덕성의 궁극적 뿌리가 ‘도덕적 연민(moral sympathy)'에 있다고 했던 흄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흄은 감정이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에 의해 어느 정도로 형성되는지, 그럼으로써 거짓된 인식을 교정하는 것이 얼마만큼이나 도덕적 판단을 바꿔놓는지를 충분히 역설하지 못했다. 사실이 변하면 생각뿐 아니라 마음 또한 바뀐다. 도덕적 진보는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특정한 도덕적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지 않는 태도가 계몽된 태도이자 진보적이라는 통념은 비뚤어진 것일 뿐 아니라 매우 해롭다. 우리의 도덕적 견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편향된 인식은 왜곡되거나 편향된 도덕, 거짓된 믿음, 잘못된 윤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실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어떤 도덕적 판단이 더 선호할 만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가망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대체로 훨씬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선입견’이 문자 그대로 ‘앞서서 내리는 판단’을 뜻한다는 점을 아는 것은 어원과 관련된 관심 이상으로 중요하다. 선입견이 발생하는 까닭은 관련 사실을 보기 전에 ‘미리’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본 다음 판단을 내릴 때 선입견, 즉 미리 내린 판단은 공정한 판단에 의해 바뀐다. ‘도덕적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지 못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도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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