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역사가 증명한 불변의 투자 법칙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
역사는 반복되고, 주가 등락에는 법칙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보지 못하고 언제나 실패를 반복하는 개인투자자들에게 역사야말로 올바른 투자의 감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우리나라 1세대 증권맨 윤재수.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는 1976년 증권업계에 발을 들여 놓고 40년 가까이 한국 주식 역사를 지켜본 그가 100년 동안 우리 증시를 요동치게 한 97개의 사건들을 선별하고, 그 전후로 주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해석한다.
일제시대 쌀과 콩 투기로 태동한 주식투자는 1971년에 코스피(KOSPI)가 탄생하며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후 1970년대 건설주, 1980년대 금융주, 1990년대 기술주, 2000년대 중국관련주 등의 호재가 한국 증시를 이끌며 숨 가쁘게 이끌었다. 이외에도 국내외적 사건들로 주식시장은 단기적인 폭락과 폭등을 거듭했다. 저자는 일시적인 소재로 인한 주식의 등락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 발생 이후 주식의 흐름이라고 말하며, 과거가 보여주는 주식의 반복된 패턴을 읽고 투자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저자 윤재수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거래소를 거쳐 동서증권에서 20년 근무했다. 한국투자증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교보증권, 신한금융투자, 하나대투증권에서 투자상담사 및 고문으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1세대 증권맨이다. 기관과 일반투자자로 40년 가까이 코스피의 현장을 지킨, 정통 주식 전문가이다. 위기를 기회로 보지 못하고 언제나 실패를 반복하는 개인투자자들에게 역사야말로 올바른 투자의 감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믿으며 이 책을 집필했다.
주식 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 저자로 주식공부를 시작하는 초보자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은 『주식투자 무작정 따라하기』를 비롯해 『주식시장 대세판단 무작정 따라하기』『차트분석 무작정 따라하기』『소설로 배우는 주식투자』 등 다수가 있다. 개인투자자들이 체계적으로 주식공부를 할 수 있게 집필된 저자의 책들을 통해 국내 주식투자 문화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차례
1896 - 1945 식민지 수탈의 도구가 된 일제시대 증권시장
국내 최초 선물거래, 1900년대 쌀, 콩 투기 /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는 조선은행 / 국내 최초의 근대적 증권거래소, 조선취인소 개설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미두시장의 승부사 ‘반복창’
1946 - 1960 국채 중심의 투기장으로 전락한 해방 후 증권시장
땅 대신 받은 증권으로 신흥 부자 속출 / 일본의 돈으로 재벌의 발판을 마련한 SK, 두산, 한화 / 한국 최초의 증권사는 대한증권 / 사채를 뛰어넘는 국채 수익률 / 투기를 부추기는 청산거래제도 / 최초 상장된 12개 기업의 운명은?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투기 대상이 된 건국국채! 1.16 국채 파동
1961 - 1970 주식 투기의 시대, 연속되는 파동
증권시장의 호황을 부른 베트남 특수 / 아날로그 방식의 증권 매매, 격탁매매 & 포스트매매 / 대증주 투기, 5월 증권 파동을 일으키다 / 증권거래소, 장기간 문을 닫다 / 2차 통화개혁 / 공매도, 공매수 전쟁을 벌인 증금주 파동 / 주식 분산 추진과 증권투자신탁업법 도입 / 수많은 투기로 기록된 1960년대 주식시장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정치자금 100억의 음모, 대증주 파동
1971 - 1980 울고 웃는 건설주와 고공행진 공모주 청약
8.3 사채동결 / 주식시장을 강타한 1, 2차 오일쇼크 / 공모주 청약으로 몰려든 개미투자자들 / 중동 특수, 건설주의 호황기를 만들다 / 제1의 건설주 파동 / 참담한 폭락, 건설주 파동의 3가지 원인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공모주 청약 전성시대, 단타도 100% 이상 수익
1981 - 1990 한국의 종합주가지수 코스피(KOSPI)의 등장
한국증시를 대표하는 지수, 코스피와 코스닥의 등장 / 큰손 장영자와 제2의 건설주 파동 / 최초 테마주, 북예멘 유전개발 관련주 / 코스피지수 최초 1,000포인트 달성 / 실적장세를 이끈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 할부식 증권저축, 전기전자주의 상승을 이끌다 / 3년간 75배 수익을 올린 대신증권 / 국민주 보급의 두 얼굴 / 황금알을 낳는 우리사주 주식 / 지방으로 퍼진 투자 열기 / 주가 대폭락의 3가지 원인 / 주가 대폭락을 잡으려는 정부의 노력 / 깡통계좌 일괄정리 조치 후 주가 폭등 / 1980년대의 투자는 개별종목보다 업종 중심이다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증권시장을 쥐락펴락한 대표적인 큰손들
1991 - 2000 외국인과 슈퍼개미 등장, 다양한 투자 기준이 생기다
외국인 투자자, 한국증시 분위기를 바꾸다 / PBR을 기준으로 대성산업에 투자한 민병갈 / 금융실명제 실시로 10월 위기설 부상 / 증권거래법 200조 폐지와 자산주의 재조명 / 확대되는 투자 기준 PER와 PBR / 소외되는 개미투자자 / 1990년대 전반 시장을 이끈 주도주 / 작전주, 개미의 눈에 피눈물을 내다 / M&A는 주가 급등락의 중요 재료 / 작전주에 울고 웃는 투자자들 / IMF 외환위기로 코스피 폭락 / 위기이자 기회인 IMF 위기 / 코스닥 광풍의 주역! 한글과컴퓨터, 골드뱅크 / 6개월간 150배, 역사상 최고 상승률의 새롬기술 / 무조건 오르는 ‘닷컴’, ‘바이오’ 열풍 / 코스닥 침몰 징조 / 코스닥 하락률 99% 버블 소멸 과정 / 코스닥 대박 종목에 대한 2가지 투자 조언 / 정부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 몰락한 투자신탁 / 채권형펀드가 마이너스 수익률? / 애국심에 호소한 바이코리아펀드와 박현주펀드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44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한 부광약품 주가조작 사건
2001 - 2010 급변하는 세계, 다원화된 주식시장
파생상품 상륙! 대한민국 증시를 뒤흔들다 / 파생상품 고수들이 물고기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유 / 9.11테러로 주가 급락! 그러나 한 달 만에 회복 / 세계증시 상승 : 코스피지수도 2,000포인트 돌파 / 투자지표를 기준으로 한 성공 투자 사례 / 저평가된 가치주 찾기 / 장하성펀드로 돌아온 자산주 / 주식의 새로운 투자 기준 / 2개월 동안 14배 폭등! 줄기세포 테마주 산성피앤씨 / 다단계식 주가조작 사건 / 스마트폰 시대 정보와 문화를 지배하는 인터넷 포털 / 우리사주로 받은 주식 급등! 매각 방법은 퇴사 / 금광, 석유 찾는 중소형주 투자 주의 / 국제유가 급등에 급부상한 태양 ‧ 풍력 에너지 테마 / 급등하는 중국 관련주 / 세계증시로 시야를 넓히다, 해외펀드 / 미래에셋 펀드 열풍 / 4대강 사업 테마주 / 세계 금융공황 발생 /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락하는 주가 / 공포의 10월 증시 대폭락 / 유행 따라 가입한 펀드, 깡통펀드 되다 / 공매도, 주가 하락을 부채질하다 / 금융위기 극복과 증시 회복 / ‘차화정’ 랠리 / 세계시장에서 통한 한국 자동차 /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9·11테러와 옵션투자
2011 - 현재 저성장 시대 횡보하는 한국증시, 역사적 변동성에 대비하라
유럽 재정위기로 침몰한‘ 차화정’ / 황당한 루머에 급등한 정치인 테마주 : ‘안랩’ 782% 상승 / ‘강남스타일’로 급등한 K팝 관련주 / 우량기업 우선주 급등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선주 파동 / 사상 최저 금리 속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 / 박스권 ‘덫’에 빠진 한국증시 / 박스권 탈출을 위한 노력들 / 주식시장 가격제한폭 확대 / 한국증시의 장기상승을 이끌 재료들 : 퇴직연금, 국민연금 / 시장에서 소액투자자가 이기는 방법 / 버블과 폭락의 투자 역사 / 역사가 알려주는 투자의 원칙 : 대박은 없다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1896 - 1945& 식민지 수탈의 도구가 된 일제시대 증권시장국내 최초 선물거래, 1900년대 쌀․콩 투기</P>인천미두거래소는 조선의 쌀값을 안정시키고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실상은 조선의 쌀과 돈을 수탈해 가려는 일제의 검은 야욕의 도구에 불과했다. 설립 초기에는 쌀 외에 콩, 명태, 석유, 방적사, 목화 등도 현물로 거래했으나 점차 쌀이 주가 되었다.
1917년부터 1928년까지 12년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쌀은 연평균 700만 석(1석은 160kg, 즉 두 가마)에 달한다. 당시 우리나라 연평균 생산량인 1,400만 석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인천부두 일대는 일본으로 보내질 쌀이 산처럼 쌓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한다.
일본인들은 인천미두거래소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두 투기로 큰돈을 번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를 믿은 전국의 지주와 지방부호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곤 대부분 패가망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두 투기 바람은 광풍으로 이어져 ‘논과 밭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다 빼앗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낟곡과 돈뭉치는 미두 바람에 몽땅 날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46 - 1960& 국채 중심의 투기장으로 전락한 해방 후 증권시장땅 대신 받은 증권으로 신흥 부자 속출지가증권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면서 소작인에게는 농지를 주고 지주들에게는 농지값을 보상해 주기 위해 발행한 최초의 정부 발행 공채이다.
이승만 정부는 16만 9천 여명의 지주에게 15억 2천 4백만원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5년 분할 지급 조건으로 발행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대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행한 이면에는 ‘자산의 대부분이 토지인 한국에서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는 대신 보상금을 받아서 기업자본을 만들어야 공업화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 만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남쪽으로 피난 온 지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지가증권을 싼값에 내다팔았다. 자연히 지가증권의 가격은 폭락할 수밖에 없었고, 부산에서는 액면가의 10%에 거래되기도 했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지가증권은 전쟁이 끝날 무렵 정부가 액면 금액 전액을 일본인 귀속 재산 불하 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가격이 액면가의 50%까지 뛰어올랐다. 단기에 4~5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위기 때 더 많았다. 전쟁 중 지가증권을 매도한 지주들은 몰락했고, 국채를 헐값에 사모아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다.
일본의 돈으로 재벌의 발판을 마련한 SK, 두산, 한화</P>해방 후 정부는 일본인 귀속재산을 민간에 팔았다. 입찰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매각 가격도 매우 낮아 인수자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은 셈이다. 우리나라 초기 기업들은 이를 발판으로 자본을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는 오늘날 재벌이라 불리는 기업도 많다. 선경(현 SK그룹의 전신), 두산, 한화가 대표적인데, 당시 이들 기업의 창업자들은 지가증권을 적절히 활용해 귀속재산을 사들였다.
1961 - 1970& 주식 투기의 시대, 연속되는 파동증권시장의 호황을 부른 베트남 특수가발 산업과 함께 우리 경제에 활로를 제공한 또 하나의 모멘텀은 베트남 특수였다. 1965년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고, 1966년~1973년까지 연인원 31만 7천명의 국군이 파병되었다. 이중 4,900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1만 1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피의 대가로 얻는 경제적 이득도 있었다. 1966년 3월에 베트남 진출 1호 기업인 한진상사가 800만 달러 규모의 항만하역 및 운송 계약을 체결하면서 ‘베트남 특수’가 시작되었다. 한진상사는 1970년 초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약 2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를 넘는 막대한 규모의 금액이었다. 한진상사는 그 돈으로 대한항공을 인수해 오늘날 한진 그룹의 기틀을 마련한다.
한진상사에 이어 현대건설, 대한통운, 경남기업, 대림산업 등도 속속 베트남에 진출했다. 1968년에는 베트남 파견 근로자 수가 1만 5천명에 달했으며, 1966년부터1971년까지 5년동안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6억 달러에 이르렀다.
60년대 후반, 베트남 특수로 경기가 급속히 호전되자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주가지수도 300% 상승하였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패전국을 재건했다면, 한국은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경제를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71 - 1980& 울고 웃는 건설주와 고공행진 공모주 청약8․3 사채동결, 기업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고리의 사채로 인한 부작용이 심화되자 정부는 ‘사채동결 조치’를 내렸다.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초법적인 조치였다.
정부의 초법적인 조치로 개인 사채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고리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집을 담보로 잡히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그 돈을 빌려준 영세 사채업자들은 은행의 원금상환 요구로 하루아침에 집을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8․3 사채동결 조치로 제도권 금리는 5%, 사채금리는 10% 이상 끌어내려졌고, 기업은 고리의 단기사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큰 이익을 본 이들은 기업가들이었다. 이를 빗대어 기업가들이 모이면 청와대를 향해 큰절을 하고 건배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은행금리가 떨어지면서 예금이자와 주식투자 기대수익률 간의 격차가 커지면서 주식투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주가가 상승하고 거래량이 증가하자 지지부진했던 기업공개도 활발해졌다. 기업공개를 촉진하기 위해 상장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내용이 담긴 ‘기업공개촉진법’이 발표되자 주가 상승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8․3 조치가 있었던 1972년에는 연초 대비 무려 127%나 주가가 폭등했다.
건설주의 몰락, 제1의 건설주 파동급등하던 건설주, 어느 날 갑자기 하락세로 돌아서다1978년 7월 말경 건설주는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하락으로 돌아섰다. 부풀 대로 부푼 풍선이 터지듯 비정상적으로 오른 주가는 떨어질 때도 비정상적으로 떨어졌다. 주식을 사지 못해 안달하던 투자자들이 1978년 7월에는 주식을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매일 하한가로 주문을 내보지만 하한가 잔량만 쌓일 뿐 사는 사람이 없었다. 투자자들이 건설주에 거품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매도시점을 놓친 상태였다.
9만원까지 올랐던 대림산업 주가는 3만원으로 떨어져 3분의 1토막이 났고, 동아건설도 7만 5천원에서 1만원대로 추락했다. 우량 건설주가 이 정도니 부실 건설주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대부분의 부실 건설주는 10분의 1 토막이 나거나 부도가 나 증시에서 퇴출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로지 건설주라는 이유만으로 주식을 매수했던 일반투자자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건설주 파동, 누가 돈을 벌었나?그러나 돈을 잃은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돈을 번 사람도 있는 법이다. 건설주 파동으로 돈을 번 사람은 누구일까?
첫째, 기업의 대주주이다. 대주주들은 기업공개 전에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유무상증자를 반복해 소위 물타기를 한 후 높은 가격에 일반 청약자에게 넘겼다. 또한 기업공개 후 주가 버블이 심할 때 보유주식을 줄이는 방법 등으로 엄청난 거금을 일시에 손에 쥐었다.
둘째, 부정한 수단으로 공모주를 배정받은 정관계 실세와 큰손들이다. 일반 서민들은 어렵게 기본수량인 50주만 배정받았지만 정권의 실세들은 뇌물로, 큰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양의 공모주를 받았고 이들은 장기보유하지 않고 고점에 매도하여 이익을 챙겼다.
1981 - 1990& 한국의 종합주가지수 코스피(KOSPI)의 등장포스코와 한전, 국민주 보급의 두 얼굴정부는 1987년 12월 1일 국민주 보급 계획을 발표했다. 공기업 주식을 매각해 대다수 국민들에게 우량 기업의 주식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국민주 보급 목적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제 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향후 기대되는 경영성과도 국민의 각 계층이 골고루 누리게 한다. 둘째, 중하위층 국민들의 재산 형성을 돕는다. 셋째, 주식인구의 획기적인 증대를 통해 자본 시장을 확충한다.
포스코와 한전 두 종목의 공모주 청약은 전국에 국민주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부분 단기투자에 그쳤기 때문에 국민 다수에게 장기투자를 유도하고 재산 형성에 도움을 주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또한 증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던 일반국민 다수를 투기성이 높은 시장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어 멋모르고 주식투자에 나선 국민들의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국민주 보급이 소기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자 정부는 정부 보유주식을 팔 때 직원 및 저소득층에게 매각주식의 98%를 배정하고 일반 청약자에게 2%만 배정한다는 국민주제도를 폐지하였다.
지방으로 퍼진 투자 열기1988년부터 1989년 사이에는 서울보다 지방의 증권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지방 증권사 창구는 투자자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장종료 후에도 투자 상담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주위에서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 농민들은 소 판 돈을 들고 왔고, 가게문을 닫고 아예 증권회사 객장으로 출근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방 투자자들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 투자자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으므로 투자 원칙도 허술한 편이었다. 대세 상승에 편승해 짧은 기간에 수익을 내자 마치 자신이 대단한 실력을 갖춘 양 착각하는 투자자도 많았다. 객장에서는 경력 2~3년 된 투자자들이 단말기를 능숙하게 두들기며 투자 성공담을 늘어놓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증시가 하락하자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대부분의 지방 투자자는 막대한 투자 손실을 입었다.
깡통계좌 일괄정리 조치 후 주가 폭등1989년에 1,000포인트를 돌파한 주가가 1990년 9월에는 그 절반인 500포인트 대로 추락하였다. 정부 당국이 12․12조치를 발표하고 주식 수요를 확충한다는 명목으로 신용융자를 확대해 주고 현금 대신 보유주식을 대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부양책을 썼지만 주가 하락세를 막지는 못했다.
1990년 9월 17일 기준으로 전체 증권사에 마이너스 잔고인 깡통계좌 수가 1만 6천개나 되고 부족금액도 2천억원에 이르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증권당국은 10월 10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깡통계좌를 일시에 반대매매하기로 결정했다. 미수금과 미상환 융자금 관련 악성매물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주가 상승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10월 10일 아침 동시호가에 강제로 매도주문을 내고 팔리지 않은 물량은 증시안정기금에서 받아주었다.
그러나 깡통계좌 일괄정리는 투자자를 두 번 울린 조치였다. 전체 깡통계좌 물량이 동시에 쏟아져나온 바람에 대부분의 종목이 하한가로 팔렸고, 깡통계좌 매물이 모두 소화되고 나자 이번에는 반대로 매물 공백상태가 발생해 깡통계좌 정리 이후 5~7일 동안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깡통계좌 일괄정리는 반대매매를 당한 투자자들의 가슴에 한을 남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91 - 2000& 외국인과 슈퍼개미 등장, 다양한 투자 기준이 생기다금융실명제 실시로 10월 위기설 부상1993년 8월 12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9시 뉴스를 보던 한 투자자는 깜짝 놀랐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대통령 긴급명령이 발표된 것이다. 그동안에는 가명이나 차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했지만 이제부터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국민들은 우리 주식에 투자된 자금 중 상당한 액수가 가․차명 계좌이고 불법적이고 부정한 돈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이런 자금이 일시에 해외나 지하자금으로 빠져나가서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우리 경제도 치명타를 입지 않을까 불안했다.
실제로 증권회사 객장에는 ‘10월 위기설’이 퍼졌고,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약 보름간 종합주가지수가 8.9%인 65포인트나 하락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가․차명 계좌의 비율은 시가총액의 2%인 6~7조원 규모에 불과했다. ‘10월 위기설’은 진정되었고, 9월 들어 외국인과 기관이 주식을 매수하면서 불안심리도 해소되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 주가로 회복되는 데는 15일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로 코스피 폭락1997년 12월, 우리 경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연초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기아가 도미노처럼 차례로 부도를 내고 무너졌다. 차입에 의존해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던 대기업이 단기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해 부도를 낸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지자 매일 수십 개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발빠른 외국인들은 보유주식을 매도한 뒤 한국을 떠나고, 기관투자가들은 앞다투어 주식 비중을 낮추었다. 1994년 11월 1,145포인트를 기록한 종합주가지수는 1997년 6월 745포인트로 하락했고, 정부의 수차례에 걸친 증시부양책에도 불구하고 12월에는 340포인트까지 추락했다.
속수무책이던 정부는 1997년 12월 3일 IMF로부터 긴급 유동성자금 210억 달러를 지원받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IMF의 요구에 따라 우리 정부는 제일 먼저 환율자율화와 금리자율화 조치를 취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도 철폐했다. 그러자 800~900원 선에 있던 원달러 환율이 1998년 1월에 2배 이상 급등한 2,000원이 되었고, 시장 실세금리도 30%에 이르러 금융시장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공황심리는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고 급기야 1998년 6월에 종합주가지수가 최저점인 277포인트까지 폭락했다.
2001 - 2010& 급변하는 세계, 다원화된 주식시장9․11테러로 주가 급락! 그러나 한 달 만에 회복2001년 9․11테러로 코스피지수는 전날 540.57포인트에서 10일이 지난 21일 463.54포인트로 14.2%나 하락했다. 그러나 주가는 1개월 만에 테러 이전 수준으로 반등했다.
역사 속 대형사건과 증권시장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개는 사건이 발생한 뒤 5~20일간 주가가 하락한 뒤 상승으로 돌아서는 패턴을 보이는데, 사건 발생 이전 수준까지 반등하는 데는 10일~1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경제외적인 단순사건의 경우, 하락과 회복의 기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에 반해 1997년 IMF 외환위기,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문제처럼 경제에 치명타를 주는 사건은 주가 하락기간이 길 뿐만 아니라 회복기간도 오래 걸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우든 하락의 골이 깊을수록 반등폭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증권시장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은 사람들은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공포의 10월 증시 대폭락세계적인 금융공황이 불어닥친 2008년 10월, 한국의 증권시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10월 1일 1,453.40포인트이던 코스피지수가 같은 달 27일 장중 892.16포인트로 내려앉아 단기에 38.6%나 추락한 것이다. 이같은 폭락은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월간 하락률에서 증시기록을 경신했다.
대부분의 상장종목이 52주 최저가 기록을 경신했으며, 10일 이상 연속 하락하는 종목이 속출했다. 한국의 대표적 우량주로 손꼽히는 포스코와 현대중공업도 연속 하한가를 면치 못했고, 상승률이 높았던 조선, 철강, 화학 등 중국 관련주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하락했다.
신용계좌는 담보부족으로 연일 반대매매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깡통계좌가 속출했다. 투자자와 증권사 직원이 투자 손실로 자살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은 대부분 위험성이 높은 신용거래나 미수거래를 했거나, 선물옵션과 같은 파생상품 거래를 했거나, 남에게 돈을 빌려서 투자한 사람들이었다.
10월 한 달 동안에만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가 무려 23번 발동되었다는 사실은 투자자의 공포심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주가가 하한가로 폭락했기 때문에 오를 때는 상한가로 올랐다. 특히 파생상품의 경우 선물과 옵션이 ‘상한가 사자’ 또는 ‘하한가 팔자’로 끝나는 진기록을 세워 파생상품 투자자들은 하루 중에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기도 했다.
2011 - 현재& 저성장 시대 횡보하는 한국증시, 역사적 변동성에 대비하라박스권 ‘덫’에 빠진 한국증시한국증시는 2011년 1월부터 2014년 11월까지 4년 동안 1,850~2,050포인트를 오가며 2,000포인트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4년 동안 지수 등락률이 10% 선에 그친 것은 1980년 이래 35년 코스피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수가 2,000포인트를 넘어서면 매물이 쏟아져나와 아래로 주저앉았고, 반면에 1,859포인트 아래로 떨어지면 주가가 싸졌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들어와 다시 반등하는 전형적인 횡보국면이 반복된 것이다.
증권시장은 경제의 거울이다. 경제가 활황이면 증시도 활황국면을 보이고, 경제가 침체국면이면 증시는 하락 또는 횡보 국면을 보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투자 역사를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증시가 4년 넘게 횡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은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져 활기를 잃고 있다는 뜻이다.
역사가 알려주는 투자의 원칙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대박 종목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박은 어디까지나 계산상의 수치일 뿐 실제 대박 종목에 투자해 돈을 번 개미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운좋게 돈을 번 극소수도 대박 종목을 찾아 연속적으로 투자한 경우 결국에 가서는 큰 손실을 입었다.
주가가 크게 급등락할 때 부(富)도 큰 폭으로 이동되어 왔다. 개인의 부가 외국인, 기관, 대주주로 이전되는 악순환을 반복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중산층이 하층민으로 추락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대변동 시기에는 개인투자자들도 부를 축적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고 최소한 부를 뺏기지는 말아야겠다. 이것이 주식투자 100년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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