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불안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불안증후군
불안과 눈을 맞춰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
우리는 끝없는 걱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문제로 "불안"을 품고 두려움과 초조함에 떤다. 이 불안은 어딜 가나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걱정"은 밤잠을 못 이루게 만든다.
과학의 발전과 요동치는 환경은 미래학자조차 단언하지 못하는 현실을 펼쳐 보인다. 주식, 부동산, 고용, 팬데믹 등 미래는 예측 불가한 미궁에 빠진 모습이다. 전문가나 정부, 기관이나 기업의 통제력을 잃은 불안이 대중에게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걱정과 불안에 잠식되어버렸다.
모호한 선택의 괴로움
무한한 정보, 개방적인 여론, 탈脫중심화 언론 시대에서 우리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다원화된 사회는 우리에게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정의 순간마다 분명한 답을 찾아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해야 한다. 예측 불가능하고 낯설고 모호한 자극에 현혹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정신을 쏙 빼놓는 현란한 마케팅 뒤에서 자신만을 위한 경제적 실리를 계산해야 한다. 과연 잘할 수 있는가? 장담하지만 누구든 자기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삶은 당당해진다.
불안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래에 대한 "끔찍한 상상"
불확실성이 불안을 가져온다. 하지만 불안을 부풀리는 진짜 주범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측"이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끔찍한 상상"이 더 큰 불안을 부르고 두려움은 몸집을 불리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로 인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초조해지고 허무와 위기의식에 빠진다.
불안은 난감한 문제이다. 불안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자석처럼 쉴 새 없이 불안한 정보를 끌어당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과 초조를 배설하는데도 거침이 없다. 인터넷 댓글이나 약한 상대를 붙잡고 트집을 잡아 쏟아낸다. 불안이 깔린 대화에서 말이 부드럽게 나올 리 없다. 자신의 불안을 전가하는 데 열을 올릴 뿐이다. 이들은 쉽게 장사꾼의 표적이 된다. "반짝 세일"은 "놓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을 살살 자극해 구매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출발선에서부터 뒤지지 마세요!”라는 말은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졌다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반복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 불안을 내면 깊은 곳에 뿌리 깊게 심어놓는다.
부정적인 마음은 편협한 사고를 만든다. 인지, 감정, 인식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어 생각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점점 고집스럽게 행동하고 스스로 제한된 틀에 가둔다. 마치 세일 기회를 놓칠까 봐 판매 정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물건을 사야만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된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일 제품을 구매하면 승리했다는 기쁨을 얻는다. "빅세일"이 다가오면 지름신이 강림하는 이유이다.
자기 사고의 바탕에 "일시 정지" 버튼을 달자. 일시 정지는 외부에서 자극이 올 때 생각과 행동 사이에 휴지休止 타임을 두어 일정한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시장을 거닐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고르거나,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꽃향기를 맡거나, 아름드리나무를 껴안고 고개를 들어 흰 구름을 바라보자. 이게 어려우면 길게 심호흡하며 신체 각 기관을 이완시켜보자. 현재 만끽할 수 있는 세계를 보며 미래에 대한 끔찍한 상상을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두려움에 떠밀리는 대표적인 증상이 미루기다. 미루고 미루다 정점에 다다르면 "해야 한다"와 "하고 싶지 않다" 사이에서 충돌한다. 마치 나무와 덩굴처럼 얽히고설키지만 결국 불안감이 승리하므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자신의 무능력함이나 적응 능력 부족을 깨닫고 우울한 감정이 돋는다. 일을 미루거나 도피하는 연장은 스스로 일시 정지 상태를 강제하는 것이다. 이때의 일시 정지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나와 일상과의 종이 한 장의 거리
매사추세츠 메디컬 명상 센터와 캘리포니아 건강연구소의 플로렌스 메이어 교수와 밥 스테어 교수가 진행하는 MBSR(마음챙김에 기반을 둔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명상 강연 둘째 날, 휴대폰을 끄고 이틀 동안 "정좌하고 침묵"하는 훈련을 했다. 강제로 철저히 일시 정지당한 나는 현기증이 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한밤중 방에 홀로 앉아 있자니 문득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메모지를 찾아 “휴식조차도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구나,”라는 한 줄을 쓰고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적막한 밤은 오롯이 나 자신과 함께한 첫날이었다. 그때부터 글쓰기가 내 삶에 들어왔다. 감정의 폭풍이 몰려오거나 물러갈 때 컴퓨터 앞에 앉아 나의 분노와 눈물, 상심과 무기력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평정심을 되찾을 때까지. 이제는 글로 나 자신과 대화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묻는 습관이 생겼다. 일상과 종이 한 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스스로 누르는 일시 정지 버튼이다. 나는 그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게 된 지금 나는 책을 쓸 만한 충분한 체력과 인내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 불안 시대
자아도취보다 자아 발견이 낫다
이기주의자를 낳는 자존감 교육
"자존감 교육"은 "너는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점을 일깨우기에 급급해 혼내거나 야단치지 않는다. 오로지 격려하며 애정을 쏟아 자신감을 높이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혹독하고 가차 없이 잔혹해서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으면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할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최고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를 방목형으로 키워야 한다", "아이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라는 자존감 교육 이론은 이미 많은 부모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부모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받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교육방식으로 아이를 대하지 않는다. 자아에 날개를 달아주어 자기 꿈을 이루게 해주호 싶은 것이다. 자신이 믿어준 만큼 "아이가 반드시 성공한다"라는 교육관이다.
그로 인해 아이들은 성공과 감정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모른다.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공만을 추구하며 시험 점수가 전부인 것처럼 군다. 그들에게 타인은 뛰어넘을 대상이거나 이겨야 할 경쟁자일 뿐이다.
환상에 빠진 전능감
기회와 유혹이 가득한 시대이다. 화려한 생활을 선보이는 아이돌, 연예인, 유튜버가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등극했다. 그들은 마음껏 자신을 발휘하고 내세운다. 팬들은 그들의 활동과 움직임 하나에도 반응하며 환호하고 눈물까지 흘린다. 만인이 주목하는 막강한 "전능감"에 너나없이 빠져든다.
한편 인터넷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 누구나 "스타가 될" 기회의 장을 열어두었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은 꿈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도와준다. 화제를 만들고 이목을 끈다면 일약 스타가 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을 쌓을 필요가 없는 듯 보이고 단 1분을 위해 10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시대를 모르는 고리타분한 교훈이 되었다. 부풀려진 미디어의 보도는 성공한 인물의 주관적인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성공 뒤에 가려진 천부적 소질이나 노력, 성실함, 기회는 묵살한 채 운만 따르면 노력 없이 성공한다는 오해를 생산한다.
최첨단 과학이 가져온 편리함도 전능감에 빠지게 한다. 스마트워치로 아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CCTV로 아이의 학습상태를 감시할 수 있다. 집안의 TV를 켜고 꺼는 것도,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도 부모가 단말기로 통제가 가능하다. 스마트기기가 부모에게 전능감을 선물하는 것이다. 아이나 통제받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감옥에 갇힌 꼴이 되며 자신만의 경계는 무참하게 침해당한다.
느슨한 대출 정책도 전능감을 부추긴다. 자신의 경제 능력으로는 구매할 수 없는 물건도 대출이나 할부를 이용하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처한 현실과 현실 대응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소소한 게임도 전능감을 부추긴다. 인터넷에서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줄 수 있고 손가락으로 터치만 몇 번 하면 수확의 기쁨도 느낄 수 있다. 클릭 몇 번이면 성도 지을 수 있다. 그 성은 언제든지 부수고 다시 지을 수 있다. 힘들이지 않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쾌감은 인간을 전능감의 자극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든다.
건강한 자기애는 현실의 자아로부터
성격장애로서 자기애의 끝은 "전능감"이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며 생각만 하면 외부 세계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해준다고 믿는다. 게임처럼 손가락만 까딱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통제되는 세상에 산다고 착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전능감은 매우 나약한 자아에서 나온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서도 나중에 현실을 마주할 때 좌절감을 맛보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떤다. 무력감, 무능감, 수치심이 우울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건강한 자기애는 자신이 현실에 대응해 귀하게 여길 가치가 있으며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진실한 자아를 분명히 인지하므로 외부 조건이 변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진실한 감정은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좋은 차와 집이 있는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도 않는다. 외적인 성과는 자기감정에 충만함과 기쁨을 부여할 뿐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스트는 외적인 성과를 잃더라도 삶을 만끽하고 용감하게 사랑할 수 있다.
삶에 대한 경외심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패
몽상가들은 “태풍을 만나면 돼지도 날 수 있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샤오미小微의 레이쥔은 “창업자는 돼지가 날 수 있는 태풍의 입구를 찾아야 하며, 태풍의 입구에만 서면 작은 날개라도 키워 더 높이 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많은 시간을 두고 어떻게 날지 고민하는 것과 작은 날개를 어떻게 키우는지는 간과한다. 그래서 태풍 앞에 선 사업가는 많아도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이다. 스스로 "작은 날개"를 키울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그친 후 어떻게 계속 날겠는가.
물론 기회는 다양하게 다가온다. 기회만 잡으면 벼랑 끝에서도 기사회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회적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 어떤 사람은 너무 일찍 자신의 운을 써버려 우담화優曇華처럼 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덕을 갖추지 못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배우겠다는 자세로 차곡차곡 쌓은 노력만이 배신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경외심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패다.
불안 탐구 생활
거침없이 화해하고 독립하자
저명한 심리학자가 상담을 바탕으로 쓴 책 《왜 가족이 힘들게 할까》는 대중에게 "원가족"이라는 개념을 알려주었다. 이 책은 원가족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부모가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장본인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가족"은 서양 사회학에서 출발했다. 미혼 자녀와 부모가 형성한 가정을 원가족이라고 부른다. 자녀가 결혼하여 새로 형성하는 가정을 형성가족 또는 생식가족이라고 한다. 여기에 부부의 부모는 포함되지 않는다.
서양의 문화에서는 원가족과 형성가족 간 경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원가족과 형성가족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강조해온 문화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삼대가 모여 살거나 심지어 사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여전히 존재한다. 비율상 "핵가족"이 훨씬 높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 부부는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는 데 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부부 중 한쪽의 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이 많고 현실적 여건으로 원가족에서 분리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가정이 많다.
"원가족" 자체는 중성적 가정의 형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최근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심지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원가족" 개념 자체를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거나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있다. 부모가 맹수라도 되는 양 도망치고 싶어 한다면 문제 아닌가.
원가족, 왜 이슈가 되었나
원가족은 어쩌다 괴물이 되었을까? 개인의 책임이 절대 아니다.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이자 선택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단지 대변자일 뿐이다.
원가족은 불안의 출구
시대가 변화하면서 가족관, 혼인관, 교육관이 바뀌었다. 사회 문화도 그렇지만 개인의 정신세계가 요동쳤다. 자신을 덮치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출구를 찾아야 했다. 이에 원가족의 구성원은 희생양이 되었다. 자신의 불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부모에게 화살을 돌리며 상처 입히고 어디에도 둘 곳 없었던 호르몬을 방출한다.
원가족은 세대 갈등의 출구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이 뚜렷해지고 있다. 한 지붕 아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두 세대가 함께 사니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원래는 몇 세대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발전이 두 세대 사이를 벌리고 있는 셈이다.
원가족은 트라우마의 출구
가정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면 상처받은 외톨이가 된다. 자기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원가족을 비판하고 자신에게 준 심리적 문제를 “모두 네 탓이야!”라고 귀결시킨다. 불안감에 대항하는 출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이 겪는 가치관의 충돌, 감정의 단절, 부모 세대의 양육 방식, 페미니즘의 대두, 새로운 가족관계 모델의 출구 찾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무의미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이다.
원가족과 분리해야 할까
독립해 살다가 부모와 함께 살게 된 청년들이 있다. 예전에 함께 살 때는 부모와 충돌 없이 화목하게 지냈지만, 다시 함께 살게 되면서는 수많은 갈등이 폭발한다. 서로의 마음도 이상하게 초조해진다. 부모와 갈등이 심화될 때 "분리"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도피이자 회피일 뿐이다. 궁극적인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면 다른 관계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한다. 상사나 동료, 친구나 연인 등 모든 관계에 불협화음이 생긴다.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자아 성장이다. 분리는 성장에 따른 부수적 조치여야 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클레어는 “사랑은 함께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만 오직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만이 분리를 목적으로 한다.”라고 했다. 양육 과정은 하나의 개체를 생리적, 정신적으로 독립시키는 과정이다. 공간의 분리뿐 아니라 심리적 독립까지 해당한다. 단칼에 무 자르듯 이루어지지 않으며 부모와 자식이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며 이루어낸다. 좋은 양육은 자녀를 부모의 복제품으로 만들어 부모의 그림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자신의 세계와 생활을 구축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자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리를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분리는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고 성장은 변화를 일으키는 물살이다. 결국, 분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따라온다. 환경의 물리적, 공간적 단절이 심리적 성숙에서 완충 작용을 한다. 진정한 내면의 분리는 자아의 성장으로만 실현할 수 있다. 성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리가 아니다. 새로운 방식을 활용하여 주변 사람과 세상을 용감하게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원가족과 화해해야 할까
화해는 자신의 경험에서 반성과 깨달음이 우러나야 한다. 부모와의 화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서 부모를 보았지만 내면까지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릴 때 본 부모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경험이 부족했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좁았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해야 한다. 자신을 과거에서 해방시키려면 분명 고통에 대한 기억, 애증이 교차하는 원한을 반복적으로 겪어야 한다. 겹겹의 장애물을 통과해 상처받은 아이를 끌어안고 "피해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완성된다. 원가족과 화해하는 길은 자기 마음과 화해하는 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이다.
불안 뛰어넘기
기준에 제압당하지 마라
인생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감정을 다스리는 잠재의식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어기제라고 부르는데 고통에 대한 무의식의 처리방식이다. 해결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돌을 처리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처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성숙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은 문제에 직면할 때, 내면의 고통을 현실적인 해결방안으로 전환해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갖는다. 그로 인해 이타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부모는 자녀에게 으르렁거리지도 않으며 자책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성숙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은 당장 고통을 벗어버리려고 책임을 남에게 돌리거나 흑백논리의 대립적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현실에 대한 환상과 왜곡으로 난관을 회피하려 든다.
미성숙한 방어기제 중 가장 흔한 방법이 "투사(Projection)"이다. 투사란 자신의 내면이 견딜 수 없는 정서적 충동, 욕망, 좌절, 원한, 갈망을 모두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난처한 감정에는 낮은 자존감, 채워지지 않는 기대, 이룰 수 없는 소망에 대한 분노가 포함된다. 악플 같은 사이버 폭력이 그 예이다. 익명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인터넷 공간에서 무책임하게 발설하고 제멋대로 투사한다. 내면이 미성숙한 부모는 업무 스트레스나 좌절감, 화, 위기감, 실망을 아이에게 날것 그대로 던진다. "숙제"는 그저 핑계일 뿐이다.
내면세계가 약하면 자기 현실을 이상화한다. 열등감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막막할수록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자신의 완벽한 상태를 상상하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꿈을 만든다.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타인을 구원하는 위치에 놓는 방식으로 정신세계에서 현실에 대한 통제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상화는 자녀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이입된다.
이를 아는 사교육기관은 상업적 이익을 쫓아 확대된 "이상화"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부모가 자녀를 "천재"로 여기게 만들어 쉽게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로 인해 아이들은 부모 욕망의 연장선이 되고 자신은 이상화된 부모의 모습이 된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원시적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분열, 부정, 폄하 등 본능적이며 낮은 수준의 반응 상태를 보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람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를 피하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1초 전까지 피아노 연습을 준비하는 아이가 부모의 눈에 "미래의 베토벤"으로 보였는데, 막상 피아노 소리가 울리면 부모는 거칠게 악보를 치며 말한다. “바보 아니니? 맞는 게 하나도 없잖아!” 부모가 자기 기분에 따라 천사에서 악마로 수시로 변한다면 자녀의 정서 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모의 "이분화"된 행동의 결과는 전적으로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떠맡겨진다. 미성숙한 방어기제는 부모가 약점을 감추기 위해 입은 갑옷이다. 고통과 책임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입었다. 하지만 오히려 고통이 가중되는 결과를 맞는다. 진정한 성장은 갑옷을 벗고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분명하게 느끼기
이제껏 입고 있던 갑옷을 벗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정서를 다루는 방식은 오랜 기간 정신에 축적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와 가정,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고 다듬은 방어기제이다. 이 낡은 외투를 완전히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인생관을 바꾸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먼저 자신의 감정 패턴을 충분히 "지각"해야 한다. 감정이 일어날 때 정확하게 그 감정을 묘사할 어휘를 찾아 이름을 붙여 보고 동시에 신체 감각을 체득해야 한다. 지금 자신의 호흡, 심장박동, 혈액, 근육의 움직임을 살피고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신체 감각의 변화에 감정은 어떻게 변하는지, 지난날의 어떤 경험과 장면에서 어떤 감정이 나타나는지, 인간관계에서 사람에 따라 반응하는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관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 체험을 충분히 이해하면 감정을 조절할 방향이 보인다. 원가족의 상호작용 방식과 지금 문제의 닮은 점은 무엇이었는가. 원가족의 반응과 상대의 반응에는 어떠한 유사점이 있는가? 왜 같은 문제가 동료와의 관계, 결혼생활 관계, 자녀와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가? 그러나 막상 자신의 문제 앞에 서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를 분석하기 위해 원가족 안에서 형성된 몇 가지 감정 패턴을 관찰해보자.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